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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보 May 23. 2024

가도 가도 포도밭이었어요

산티아고순례길 26일차

   평화로운 저녁입니다. 바람과 햇볕이 빨래를 말리고 데이지, 미나리아재비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어요. 일곱 시인데요, 아무도 방으로 들어갈 생각을 않네요. 해가 지려면 아직 너무 많은 시간이 남았어요. 오늘은 지금껏 까미노에서 가장 여유로운 오후와 저녁. 나는 지금 잔디 위 썬베드에 해를 등지고 누워 있어요. 바람은 차가워요, 햇볕은 따갑고. 담요 한 장만 있다면 완벽할 텐데.


알베르게에서 몸을 말리는 빨래들
알베르게 잔디마당에서 휴식 중인 순례자


   이제 정말 산티아고가 얼마 남지 않았어요. 170km 정도밖에 안 남았어요. 많이 걸어왔어요, 정말 많이. 600km를 넘게 걸었어요. 육 칠일 정도면 까미노의 끝, 산티아고예요.


   오늘은 포도밭을 지나왔어요. 가도 가도 포도밭이었어요. 처음 까미노를 시작했을 땐 포도밭에 잎이 하나도 없었는데 오늘 지나온 포도밭에는 잎이 꽤 많았어요. 4월 중순에 내가 지나왔던 포도나무에도 지금은 잎들이 많이 달렸겠죠.  

   포도나무들은 여름의 태양 아래 꽃을 피우고 포도알들을 맺고 자라서 포도주가 되고. 여름의 까미노를 걷는 사람들은 포도만 보고 걸을 것 같아요. 가도 가도 포도라고, 일기장에 그들은 적을 것 같아요. 돌아가면 와인 한 잔 해요. 스페인 5월의 따가운 햇빛, 차가운 바람을 가져갈게요.


5월 녹음의 까미노(길)


길을 가다 19km 남은 줄 알고 깜짝 놀랐다. 자세히 보니 마지막 숫자, 일의 자리가 지워져 있었다
5월의 포도밭 1


5월의 포도밭 2


   사실 어제는 좀 무모했어요. 반성합니다. 아무리 순례자라도 자동차 전용도로로 들어가다니.... 다행히 갓길이 넓고 옆으로 걸을 만한 공간이 있어 다행이었지 안 그랬다면. 초입부터 자동차 전용도로인 줄은 알았는데, 어떻게 되겠지 싶어 그냥 들어갔어요.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야겠어요. 쌩쌩 차들이 달리는데....

   어제 많이 걸어서 오늘은 좀 적게 걸으려고 했는데 오늘도 많이 걸었어요. 30km 걸었어요. 이곳에서는 내가 가장 대책 없는 사람입니다. 다른 이들 전부 다음 숙소를 예약하고 다니는데, 나만 그냥 다녀요. 오늘도 대만 사람과 대화하다 예약 안 하고 다닌다니까 놀라더라고요. 그냥 끝까지 예약 안 하고 걸을 작정입니다. 걱정 마세요. 노숙은 안 할게요.


   묵으려 했던 무니시팔(공립) 알베르게는 와서 보니 폐업했네요. 앱에는 영업하는 걸로 되어 있는데.... 옆에 있던 브라질 여자분이 전화로 알베르게를 구해서 같이 갔어요. 좀 비쌌어요, 13유로. 그래도 좋긴 하네요. 깨끗하고. 화장실도 넓고. 잔디마당에 냇물도 흐르고. 모처럼, 아주 모처럼 편안한 오후의 휴식을 가졌어요.


   오는 길에 '스페인 하숙'을 녹화한 마을, 비야프랑카를 지나왔어요. 차승원하고 유해진이 나오는. 마을이 예쁘더군요. 티비에 나오는 것보다 더 예뻤어요. 대체적으로 산악마을이 작고 예쁜 것 같아요. 묵을까 생각하다, 너무 이른 오전이라 그냥 지나왔어요. 나는 요즘 한국사람은 보기 드문 시간표로 움직여요. 길을 걸어도 순례자들도 많지 않아요. 여기까지 와서 다른 사람과 같이 움직일 필요 있나 싶어요.


스페인하숙을 녹화한 마을, 비야프랑카 1


스페인 하숙을 녹화한 마을, 비야프랑카 2


   까미노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지만 삶은 아직 많이 남았어요. 이제부터라도 다른 사람과 경쟁하지 않고, 시기하지 않고, 비교하지 말고 살아요. 지금 까미노가 나에게 하는 말이에요. 오늘도 나와 당신에게 부엔 까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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