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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보 May 24. 2024

검은 빛을 띤 것들은 깊은 무엇을

산티아고순례길 27일차

   티셔츠 하나, 수건 두 장, 샴푸 한 통, 장갑 한 짝. 제가 까미노에서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입니다. 수건은 박정현 씨에게서 하나를 얻었는데 그마저 어제 알베르게에 놓고 와 버렸네요. 수건은 이제 하나 남았는데 이걸로 산티아고까지 버텨볼래요. 수건이 없으면 런닝을 꼭 짜서 닦으면 된대요.


   계획했던 일정보다 이틀을 당겨서 산티아고에 도착하려고 합니다. 갑자기 포르투에 가고 싶어 져서요. 포르투갈은 스페인 옆이지만 스페인과는 또 다른 분위기라는군요. 포르투는 전에 노래 부르는 프로 '비긴 어게인'에 나왔던 도시인데. 강도 있고 바다도 있는 도시래요. 우리가 사는 곳도 강과 바다가 있는데.... 포르투에서 마드리드, 바르셀로나를 거쳐 파리공항으로 갈 예정입니다. 이틀만 당겨서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시간은 될 것 같아요.


   무슨 말부터 할까요. 오늘 숙소에 들고 갑자기 당신이 보고 싶어 졌습니다. 아니에요. 산정상 마을 오세브레이오를 아침에 들어설 때에도 당신이 보고 싶었습니다. 아침 운무 속에 있는 산아래를 보며 당신이 저 아래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어요. 당신은 이 깨끗한 마을의 성당 같고, 종탑 같고, 돌담 같아요. 지금도,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도.


   레온 주에서 갈리시아 주로 오늘은 넘어왔는데, 이제부터 산악길이 계속되나 봅니다. 힘들었어요. 설악산이나 한라산만큼은 아니지만. 좋은 것도 있었어요. 오르고 올라 계속되는 능선을 걸을 때, 눈 아래 펼쳐지는 초록들과 노란 꽃, 스페인행복이라 내가 이름 붙인, 무리들.


   그리고 산꼭대기마을, 오세브레이오가 나왔어요. 돌담에 거주하는 이끼와 검은 빛을 띤 돌담 너머 성당과 함께. 검은 빛을 띤 것들은 깊은 무엇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검은 초록, 검은 빨강, 검은 푸름. 검은 슬픔, 검은 기쁨, 검은 웃음....


   나는 이 까미노에서 본 것들 중에 산정의 이 마을이 가장 좋은 것 같아요. 아, 이전의 좋은 것들을 망각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어요. 생각해 보면... 그래요, 좋은 것들이 꽤 있었네요. 그리고, 이 말은 너무 유치한 것 같아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산정의 오세브레이오 마을은... 양희은 한계령, 그 자체였어요. 이 산, 저 산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산위에서 내려본 운무


산정상 오세브레이오 마을의 입구


오세브레이오 마을의 카페


   좋은 것만 계속 이어지지는 않았어요. 오세브레이오를 지나서는... 소똥 말똥 기억만 많이 나요. 소를 많이 치는 지방인가 봐요.


   올 때 전자책, 독서모임에서 한번 읽었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구입해서 왔는데, 좀처럼 읽을 시간이 없네요. 걷고, 잠자고, 쓰고, 이 세 가지도 벅차요. 못 읽는다는 것, 아쉽네요. 정말 완벽한 것은 내 것이 아닌가 봐요.



오늘 묵는 마을 트리아카스테라로 가는 길 옆, 들꽃들


오늘 묵는 트리아카스테라 마을의 입구와 입구의 나무


트리아카스테라 마을 1
트리아카스테라 마을 2


   나는 다섯 시이니 당신은 지금 정오겠군요. 요즘도 점심시간에 산책을 합니까? '요즘'이라고 하니 우습군요. 아주 오래전 떠나온 것처럼.


  당신의 오후와 우리가 아는 모든 이들의 오후에, 또 나의 새벽에, 부엔 까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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