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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보 May 27. 2024

도시의 욕망 앞에 별들은

산티아고순례길 28일차

   백십 킬로미터 조금 넘게 남았습니다. 이제 나흘만 걸으면 끝이에요.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어떤 기분일까요. 아쉬울까요? 허전할까요?

   

   들판 한가운데 있는 숙소입니다. 들판에 이 집만 있습니다. 옆집도 없어요. 문밖을 나가면 사방이 키 작은 밀밭이에요. 정말 운이 좋아요. 이런 호젓한 숙소에 들다니. 사람들은 보통 직전의 사리아라는 큰 도시에 묵습니다. 나는 도시가 좀 밋밋하게 느껴져서 지나쳐 왔는데 이런 행운이.  


   너무 피곤해서 오늘은 글을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숙소 마당의 해먹에 누워, 흔들리는 나무의 잎들과 하늘을 볼 때는요. 그래도 산티아고에 도착할 때까지는 힘내서 써 볼래요. (해먹이 이렇게 편한 줄 몰랐어요. 내 몸을 감싸면서 하늘과 나무는 다 보여주는군요.)


숙소 문밖은 사방이 키작은 밀밭입니다.


숙소의 마당 1


숙소의 마당 2


   육체의 피로는 참 좋은 것 같아요. 부동산도, 주식도, 정치도 없는 이곳에서, 육체의 피로는 나를 맑게 만들어요. 생각이 없어져요. 내가 하늘이 되고, 흔들리는 밀이 되고, 나무가 되고 돌이 되는 기분이에요. 걷고 씻고, 잠시 앉았다 먹고 자는 단순한 일과. 잠도 깨끗한 잠이에요. 깊은 숲 속 검푸른 나뭇잎 사이를 흐르는 시냇물 같은 잠이에요.


   방금 별을 보고 왔습니다. 여기는 불빛 하나 없는 들판 한가운데구나, 생각이 퍼뜩 들었거든요. 깨끗하게 별들이 자신을 드러냈어요. 밤하늘에서, 도시에선 숨어있던 별들이 캄캄한 들판 한가운데 숙소 마당에서. 도시의 욕망 앞에 별들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요.


    숙소에는 이스라엘 할머니 두 분, 포르투갈 젊은 부부, 말을 하지 않은 남자, 나 이렇게 여섯 명만이 들었습니다. 이 숙소의 주인은 영어를 전혀 못해 나는 의사소통에 곤란을 겪었는데, 이스라엘 할머니가 스페인 말을 조금 해서 저녁식사 주문을 같이 해 주었습니다. 할머니 두 분은 채식주의자라 수프와 샐러드만 주문했습니다. 주인남자가 나에게는 '까르네' 했었는데, 알고 보니 돼지고기였어요. 푸짐한 샐러드와 수프, 돼지고기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스페인가정식 같았어요.


   육체의 피로와 맛있는 저녁식사, 깨끗한 잠..., 하나가 더 있어야겠네요. 깨달음. 그러면 완전한 것 같아요. 돈은?... 있어야겠지만 많이는 필요 없어요.


   오늘 길도 좋았습니다. 지금 걷고 있는 곳은 산악지역입니다. 까미노는 처음에는 평원이었는데 지금은 산악길을 보여주네요. 오늘 오전은 설악산 자락 마을 느낌의 길을 오래 걷고 이끼와 고사리가 많은 그늘지고 시원한 길도 오래 걸었어요. 사모스라는 마을에 거대한 수도원이 있었는데 시간이 맞지 않아 내부는 볼 수 없어 아쉬웠습니다.

   오후, 오르막 길 중간에 땅바닥에 앉아 쉬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스페인 할아버지가 뭐라 뭐라 하길래 아임 오케이 하면서 일어나니, 내 등을 두드리며 한참을 또 뭐라 뭐라 하는 거예요. 말하는 톤으로 보아 힘내라는 말 같았습니다. 내가 무척 지쳐 보였나 봅니다.

오전의 산악길 1


오전의 산악길 2


오전의 산악길 3


사모스 마을의 수도원. 시간이 맞지 않아 내부 구경은 못했다.


수도원의 뒷길

   

   뿔뽀라는 문어찜 요리를 먹어보았습니다. 문어가 문어지 스페인이라고 문어가 소고기가 되겠어요. 비싸기만 하고 맛은 별맛 없는, 문어맛이었어요. 하몽도 짜기만 하고 별다른 건 모르겠던데..., 나는 음식은 포기해야겠어요. 


   당신에게 미안한 마음입니다,  오늘은 나 혼자 이런 좋은 것들을 보는 것이 무슨 의미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신이 하고 싶은 것을 당신도 꼭 할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당신에게,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오늘도 부엔 까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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