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랫동안 방치되어 형태를 잃어가던 알갱이들을 조심스레 다시 손에 담았다.
하지만 그것들은 손바닥 위에서 미묘하게 굴러가며, 마치 오래전에 주인을 잃은 물건처럼 낯선 촉감을 남겼다. ‘나’였던 것들이 이상하게도 나를 온전히 채워주지 못했고, 텅 빈 속이 그대로 울렸다.
좋아했던 영화를 틀어보았다. 장면 하나, 대사 한 줄에도 마음이 흔들리곤 했는데, 화면 속 인물들이 말하고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붙잡을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좋아하는 아이돌을 검색했다. 무대 위에서 웃는 얼굴, 반짝이는 순간들. 예전엔 보기만 해도 심장이 터질 듯 뛰던 순간들이 화면 너머에서 흘러갔다. 하지만 심장은 조용했다. 오래 방치된 방에 먼지가 쌓이듯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제야 알았다. 나는 생각보다 훨씬 깊이 망가져 있었다.
그 시기는 마치 미각을 잃은 것처럼, 행복이라는 감각이 통째로 사라진 시기였다. 웃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웃음은 나오지 않았고, 기쁘다고 말해도 마음은 미동이 없었다. 모든 감정이 둔해지고, 손끝으로 만져지지 않는 안개 속에 갇힌 느낌이었다.
세상에 불어오는 바람이 너무 거세어, 붙잡을 땅 없이 허공을 떠다니는 뜬구름이 된 기분이었다. 어디에 닿아야 할지,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었다. 나조차 내가 지금 어디쯤 서 있는지를 모른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그래서 무엇이든 붙잡고 싶었다. 지금 이곳에 서 있는 내가 ‘나’라는 확실한 감각이 필요했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좋았다.
나는 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 늘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던 책들이, 그때의 나에겐 단순히 종이 위에 나열된 자음과 모음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생존하듯, 알갱이 하나라도 주워 담듯 책장을 넘겼다. 단 한 문장이라도 마음을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다 한 문장 앞에 발이 묶였다.
'달력을 넘기며 그때 그러지 말걸, 후회하며 맴돌지 않기
그때 참 좋았는데, 매달리며 머물지 않기
안녕 해야 할 마음과 안전하게 안녕하기'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겠지만 오늘 밤은 어떡하나요』 연정-
눈으로 읽고, 입 안에서 조용히 되뇌고, 다시 눈으로 글자를 더듬었다. 글자를 따라가던 손끝에 체온이 돌아오는 듯했고, 심장 한 구석에서 아주 작게 ‘쿵’ 하고 울림이 퍼졌다.
그 문장을 읽기 전까지 나는 스스로를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제야 깨달았다. 내 안에는 늘 유치원 졸업식 날, 엄마 앞에서 혼자 울고 있던 내가 그대로 남아 그 자리에서 맴돌고 있었다는 것을. 그때의 그 외로움과 두려움을 억누르기 위해 지금의 동그라미를 만들어왔던 것이다.
문장을 거듭 읽으면서, 상처받았던 내 안의 그 아이와 조용히 눈을 맞췄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안전하게 안녕을 말하고 싶었다. 그 아이가 스스로 망가지며 아파하지 않기를 바라며, 이제 혼자인 내가 또다시 상처받지 않도록 조금씩 조심스럽게 나를 다시 세워보기로 했다.
마모되어 형태를 잃었던 작은 알갱이들을 하나씩 들여다보며, 조금 울퉁불퉁하고 각이 져 있어도 그것이 ‘나’라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애썼다.
형태를 잃고 부유하던 나는 이제 천천히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고 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마모된 작은 알갱이들이 조금씩 모여 내 온전한 나를 만들어가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