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민 쌤, 퇴근 전이지만 이거 내일 아침까지 해줘.”
5시 50분. 사무실엔 ‘오늘 수고했어’라는 가벼운 인사와 함께 다들 가방을 챙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 시간은 내게 하루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출근의 시작이었다. 그녀가 건넨 파일은 언제나처럼 묵직했고, 설명은 짧았다.
처음엔 일이 익숙지 않아서 그런가 싶었다. 그러나 그런 날들이 하루, 이틀 늘어만 갔다. 늘 퇴근 무렵에 떨어지는 업무, 인수인계 없는 시작, 그리고 작은 실수 하나에도 꼬리를 물 듯 부풀어 오르는 꾸중. 퇴근 시간에 맡겨진 업무는 열한 시가 되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고, 그 피로 속에서 오히려 자잘한 실수는 늘어만 갔다.
나는 스스로를 다그쳤다.
“내가 못나서 그래. 내가 더 잘하면 돼.”
스스로를 깎아내는 말은 점점 날카로워졌다. 이미 모서리를 깎아 동그라미를 만들려 했던 내가, 이번엔 그 동그라미조차 더 매끈하게 보이게 하려다 나를 더 짓이기는 꼴이었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동그라미가 되고 싶어 깎아낼수록, 나는 점점 더 모나지고 작아진다는 걸. 비워진 자리만큼 불안이 차올랐고, 남에게 맞추려는 노력은 오히려 나를 초라하게 만들 뿐이었다는 걸.
그럼에도 나는 그 동그라미를 놓지 못했다. 완벽한 형태가 아니면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할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나리 쌤.”
그녀가 내게 똑바로 시선을 두고 건넨 이름은 내 이름이 아니었다. 내가 입사하기 전 그녀가 가장 싫어하던 직원의 이름. 그리고 그 직원은, 나와 자매라고 해도 믿을 만큼 닮았다고 했다.
그녀가 내 이름을 잘못 부른 순간, 나는 이상하게도 안도와 허무를 동시에 느꼈다. 그동안 그렇게 애써 쌓아온 동그라미가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실은 아팠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 미움이 내가 아닌 누군가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아주 희미하게나마 알 수 있었다.
그 깨달음은 확신이라기보다는, 안개 속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길과 같았다. 내가 문제라서가 아니라, 이미 정해진 틀 속에서 나는 계속 깎여왔다는 것. 그 생각이 떠오르자, 비로소 왜 이렇게까지 힘들었는지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나는 깎여 형태를 알아보기 힘든 작은 조각이었다. 내 안엔 스스로를 깎아내려야만 한다는 습관도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아주 작게나마 마음속 한 구석에서 ‘이건 내가 온전히 잘못한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숨구멍이 생겼다. 그리고 그 숨구멍을 따라,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을 위해 발을 조금 움직여보고 싶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나는 늘 남을 위해만 노력했다. 다른 사람에게 맞추기 위해 나를 깎아내고, 내 모양조차 잃은 채 달려왔다.
하지만 이제는, 아주 조심스럽게라도, 나 자신을 위해 발을 떼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그 한 발자국이 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할지라도, 그것이 내 돌처럼 굳어버린 모양을 조금씩 바라보게 하고, 내 마음을 지켜볼 수 있는 작은 시작이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