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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객

고열과 전신통으로 몸에 남는 흔적

by 아나스타샤

업무 특성상 경로당을 돌며 어르신들을 만날 기회가 많다. 할머니들을 만나면 소싯적 얘기부터 옆집 아무개 얘기까지 금세 보따리가 풀어지기 일쑤다. 밭농사, 논농사, 자식 농사, 갖가지 농사 이야기들이 풀린다. 그날따라 할머니들과 나눈 많은 이야기 중에 동네 병객(몸에 늘 병을 지니고 있는 사람)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마음에 남았다. 옛날부터 병치레를 많이 하는 병객이었던 할머니가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끝으로 경로당을 빠져나왔다. 사연 많은 할머니네들의 이야기를 적당히 끊고 나오는 것 또한 기술이다.


병객. 익숙지 않은 단어 속에 내가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옛날부터 약골이었던 나는 여기저기 아픈 곳이 많았다. 이것저것 가리는 것 없이 잘 먹는 식성에 비해 체력은 늘 좋지 않았고 제대로 힘을 쓰고 살지 못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피곤함으로 지치는 날이 많았고 억지로라도 일을 만들어 움직이지 않으면 쉽게 무기력해졌다.


어쩌면 나는 예민하고 섬세한 성격 탓에 병객을 자처하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5월 더위를 재촉하듯 비가 자주 내렸지만 날씨는 쉽사리 더위를 허락하지 않았다. 본격적인 여름더위가 시작되기 전 지구별 자연의 아름다움을 잠시나마 만끽하도록 틈을 내어주었다. 하늘은 세상 모든 것을 품으며 자연 각각의 색이 빛나도록 펼쳐져 있다. 구름은 더없이 하얗고, 초록 나뭇잎은 별도의 코팅제 없이도 반짝반짝 빛이 났으며, 들꽃들은 작은 체구에도 서로의 색감을 뽐내고 있었다. 몸과 마음의 고단함은 눈에 가득 담아지는 풍경들로 씻어낼 수 있었다.


몸에서 보내는 뭔지 모를 이상한 신호들을 빼면 평화롭다면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몸이 자꾸 붓기 시작했다. 만성피로 때문에 안 그래도 몸이 무거운데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부어 있는 몸은 버거웠다.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만 있었다. 감기 몸살도 아닌 전신통(뻐마디마디가 심하게 쑤심)으로 이틀을 꼬박 앓아눕기도 했다. 열증상이나 다른 증상(콧물, 기침, 가래 등)은 없어 일반적인 감기 몸살과 달랐고 처음 느껴보는 전신통증이었다. 이틀을 앓고 난 뒤 몸에 남겨진 흔적이라곤 왼손 검지손가락이 유난스럽게 부어있는 정도였다.


뭔가 문제가 있구나 싶은 느낌적인 느낌으로 내과를 찾았다. 진료실에 들어가 며칠 전 상황을 설명하고 검지손가락 하나만 비정상적으로 부어 있는 것을 보여주었다. 의사 선생님은 내과적인 혈액검사 진행 후 이상 없으면 정형외과로 가보라고 했다. 다행인 건지 혈액검사 결과 내과적으로 이상소견은 없다고 했다. 내과 의사 선생님은 손가락붓기에 대한 정형외과 진료를 보도록 권유했다.


내가 골골대는 경우는 다반사라 가족들도 그저 몸살이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일주일쯤 뒤, 다시 이상함을 느꼈다. 갑작스러운 고열(40도)과 오한, 전신통, 목 부음 증상으로 응급실을 찾았다. 나는 응급실 병상에 누워 해열제를 맞는 동안에도 발을 동동 구르며 전신통을 호소했다. 삭신이 쑤신다는 말을 제대로 체험하고 있었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코로나 및 독감 검사를 했고 음성이었다.


응급실에서 처방받아 온 해열제를 이틀 넘게 먹었지만 열은 시원하게 내려가지 않았다. 며칠째 열이 나는 통에 몸에 있는 수분과 숨결이 증발해 버려 기력은 없었고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해파리가 된 것 같았다.


고열과 전신통은 또다시 몸에 흔적을 남겼다. 온몸에 빨갛게 점점이 찍혀 있는 피부 점성출혈. 늦은 오후쯤 겨우 몸을 일으켜 다시 내과를 찾았다. 나를 본 의사 선생님은 일주일 전 혈액검사에 특이소견은 없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다시 혈액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혈액검사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녹아내리고 있었다. 검사결과를 들여다보던 의사 선생님은 당황한 듯 심각하게 말했다. 혈소판수치가 절반이상 감소해 응급으로 큰 병원을 가라고 했다. 혈소판수치가 감소했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감이 오지 않았던 탓인지 아니면 계속되는 고열증상으로 정신이 맑지 않아서인지 갑작스러운 의사소견에 남편과 나는 바보 같은 말을 했다.


"지금 시간이 늦은 거 같은데 내일 오전에 가면 안 될까요?"


내 귀에서 심장박동 소리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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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스타샤 가족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회사원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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