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을 살자
세상에서 가장 무자비한 것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시간’이라고 답할 것이다. 시간은 소리 없이 가속이 붙어 어느새 우리를 당황하게 만든다. 아침이 오면 어제와 똑같은 하루를 살고 있는 듯한데, 어느 순간 뒤를 돌아보면 지나온 길이 너무 멀어져 있다. 벌써 이 낯선 나라에서 22년이 흘렀다. 나는 여전히 16살, 한국을 떠나던 그때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인데 말이다. 세월이 흘렀음에도 크게 성숙해졌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고, 그저 숫자만 늘어가는 기분이다.
나도 그렇지만, 나이가 훌쩍 들어버린 부모님을 보면 시간의 흐름이 얼마나 무서운지 실감하게 된다. 나의 삶의 모든 기준은 16살 때에 맞춰져 있어서,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그때와 비교하는 버릇이 생겼다. 2003년의 부모님의 젊었고, 무엇이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나이였다. 그런데 이제 내가 그때의 부모님의 나이에 가까워지면서 그들의 입장에서 이 시간들을 되돌아보게 된다.
조국을 떠나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낯선 땅으로 옮겨가겠다는 결정을 내린 부모님을 생각하면, 그 용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그들은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나라, 언어조차 통하지 않는 곳으로 우리 가족을 이끌었다. 그저 먼 타국의 꿈만을 안고서. 떠나는 순간이 얼마나 두려웠을지, 앞으로 펼쳐질 삶이 얼마나 불확실했을지, 이제야 조금씩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심은 어쩌면 단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4명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결정이었다. 익숙했던 집과 거리, 늘 마주하던 사람들을 뒤로한 채, 생활의 틀을, 언어를, 환경을, 그리고 심지어 우리 가족의 미래까지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일. 그 선택이 없었다면 우리의 삶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겠지?
사실 이 시간들 속에서 마냥 행복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원망도 있었고, 도망치고 싶었고, 심지어 3년이라는 시간을 도망친 적도 있다. 결국 그 길이 막혀 다시 돌아오게 되었지만 말이다. 이곳에서도, 한국에서도 나는 이방인이 되어버린 듯하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1.5세. 평행 세계가 있다면…. 대한민국에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살아가는 나는 어떤 모습일까? “정상궤도”안에서 삶을 살고 있을까? 이민이란 건 우리에게 축복일까 재앙일까? 나는 이제 성인으로써 내 인생의 선택이 가능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난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 나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잘 쓰고 있는 건가? 자신 있게 대답을 하지 못하는 나다.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할까? 언제까지 자책만 하고 살아야 할까? 결론적으로 나는 주어진 이 시간을 더 사랑하고 후회 없이 보내고 싶다.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거나 “what if?”라는 시나리오를 반복해서 몽상하는 것은 그만둬야겠다. 과거의 나와 우리를 인정하고 반성할 점은 반성하되, 현재의 삶이 집중해야 한다. 시간은 침묵 속에서 이렇게 성큼 다가오고 있지만, 우리가 그 시간을 사랑으로 채우고 매 순간 사랑의 선택을 한다면, 인생의 후회는 분명 줄어들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을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