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M 05:28

해피 30!

by 한운후

PM 05:28


창틀에 튀기는 빗물 소리가 커져갔고, 하얬던 벽지는 노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다. 겉에 오돌토돌했던 섬유의 질감을 잃은 것처럼 매끄러웠다. 머리칼과 손의 그림자가 교차했다. 호기심에 머뭇대고, 다시 나아가는 움직임이었다. 아희는 이제 모든 방의 모습과 각 문마다 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나 장력이 다르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두꺼운 UFO 모양의 탁자가 한가운데 놓여있는 놀이실 공기가 평소보다 더 습하고, 비릿했다. 다른 선생들이 오후 세 시만 되면 환기를 빼먹지 않는 이유가 분명 있었다. 그리고 하늘이 탁해도 채광이 좋은 후문 현관은 겨울의 길고양이들이 수시로 드나들만했다. 비 오는 날 우산이 없다는 사실이 그녀를 자유롭게 만들었다.

주방 문이 열려 있었다. 향긋한 세제와 바깥의 풀냄새가 섞인, 미지근한 바람이 아희의 얼굴에 쏟아졌다. 한 발을 욕실 타일이 깔려있는 주방에 올렸고, 몸을 기울였다. 열려있던 안쪽 창문으로 바람이 오가는 탓에 찬장 손잡이 고리에 껴있던 고무장갑은 악수를 하듯 공중에서 흔들거렸다. 행주 가장자리에 맺혀있던 물방울이 온갖 곳에 튀기고 있었다. 그 방향은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바뀌었고, 그 틈새로 드는 작은 연녹색 빛이 온 주방을 밝히고 있었다. 그 순간 밖에서 징이 울리는 듯한 격렬한 쇳소리가 한 차례 들려왔다. 등골이 서늘해진 그녀는 허릴 숙여 창가로 발을 뻗었다. 완전히 물기가 말라있는 곳만 조심스레 누볐고, 조리대에 두 손을 짚은 채 창문 가까이 머릴 가져갔다. 짙은 남색의 치마가 모래장 위에서 쉼 없이, 힘없이 떠다니고 있었다. 희미한 빛 속에서 그건 사막을 나도는 남색 오로라처럼 보였다.

"민영씨."

아희가 손톱으로 유리창을 톡톡 두드렸다.

모래에 빠진 귀걸이나 보석을 찾듯 아래로 수그리고 있던 여자가 고갤 돌려가며 목소리의 근원을 찾았다. 창가에 누군가의 기척을 느낀 그녀는 허릴 꼿꼿이 세웠다. 카디건 밑단은 뒤집혀 있었고, 양손은 검붉은 자두색 나무 재질의 다면체 도형들로 가득했다. 아희가 손을 흔들자, 그녀도 손을 흔들었다.


"도와드릴게요. 이 장난감들 전부 모래에 묻으면 될까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아희가 플라스틱 상자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내 목소리가 너무 차가웠나? 조용히 물어도 충분히 들었을 텐데, 너무 크게 튀어나온 게 아닐까? 말들이 동굴의 메아리처럼 속에서 맴돌았다. 더는 입술을 깨물며 습한 두 손을 비비거나, 모래장 테두리를 서성이며 그저 민영이 하는 일을 관찰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다시 일어선 그녀는 건너편으로 걸어갔다. 쓰러져 있던 의자의 판다 얼굴 모양의 등받이를 잡고 바로 세웠다. 그리고 주저 없이 모래장에 한 발을 내밀었다.

"아니, 거기 아닌데." 민영이 손사래를 쳤다. "뭘 하시려는 거예요?"

아희는 황급히 균형을 잡았다.

"도와드리고 싶어서요."

"빨래 바구니 안에 코끼리가 있어요. 저쪽에 묻으세요."

"저기예요?"

아희는 바구니 쪽으로 움직였다. 무거운 증기처럼 고운 비가 얼굴에 내려앉았다. 그녀는 아직 아무런 사연이 없는 듯 보이는 판판한 땅을 주시한 채 허릴 숙여 코끼리의 플라스틱 상아 부분을 잡아당겼다. 모래장의 4분의 3 정도가 특별한 규칙이나 힌트를 잉태한 것처럼 울퉁불퉁했고, 각각의 언덕마다 물건의 일부가 아주 조금씩 바깥으로 드러나 있었다. 허리까지만 모래에 잠긴 채 하늘을 바라보는 뚱뚱한 마젠타색 벌레 인형, 양처럼 북슬대는 하얀 곱슬 털의 늑대, 손과 발이 달린 도자기 의자, 뱀 같은 하얀 꼬리, 인형의 집 화장실 칸에 들어있던 작은 유리 욕조 등.

아희는 모래를 더 끌어와 달리는 사람 모양을 한 파란색 고무 장난감을 가리고는 말했다.

"전부 다 찾는데 5분도 안 걸릴 것 같아요."

민영은 그저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아직 완전히 어둠에 잠기지 않아 해가 있을만한 자리에 유독 보라와 주황이 섞인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희는 그녀를 따라 창고로 향했다. 폭 1.3m의 텃밭용 비닐 두루마리는 흙으로 채워진 주차 말뚝만큼이나 묵직했다.

"셋, 둘, 하나."

민영의 목 언저리에 마치 담벼락에 붙은 넝쿨처럼 굵직한 푸른 핏줄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녀의 왼손에서 두루마리가 미끄러지더니 바닥이 쿵하며 들썩였다. 아희는 그녀가 재빨리 뒤돌아 소매를 잡아당겨 둥글게 여미는 걸 볼 수 있었다.

"다시. 셋, 둘, 하나."

두루마리가 끌려간 자리에 지진기록계 같은 삐죽빼죽한 선들이 남았다. 창고에서 멀어질수록 아희는 점점 손가락 끝으로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축축한 어깨엔 찬 바람이 스쳐 지나갔고, 눈썹에 맺혀있던 따스한 땀방울이 콧볼까지 흘러내렸다. 그들은 모래장 뒤편의 시소 앞에 다다라서야 다시 허리를 필 수 있었다. 비를 흡수한 모래에서 귤의 상큼한 향이 올라왔다. 잠시 눈을 감고 잠시 공기를 들이켠 아희는 이상하게도 낮보다 몸이 더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그녀는 왼쪽 뺨에 들러붙은 젖은 머리카락 가닥들을 귀 뒤로 넘기고는 눈을 찡그렸다. 금세 건너편 모래장까지 투명한 카펫처럼 비닐이 펼쳐져 있었다. 민영은 한 손을 발처럼 사용했고, 민첩한 동물처럼 쉴 새 없이 펄쩍거리며 비닐 옆에 또 다른 비닐 한 겹을 더 깔고 있었다.

서쪽에서 온 바람이 놀이터 주위를 점점 거세게 에워쌌다. 그네가 움직이고, 시소가 덜컹거렸다. 모래장 한쪽에 묻혀있던 비닐 끝자락이 빠져나왔고, 난폭하게 펄럭이기 시작했다. 민영이 비닐 위로 무릎을 꿇고 생각에 빠진 사이, 검고 푸석한 머리카락이 탄력 있는 다리들로 춤을 추는 문어처럼 그녀의 머리를 감쌌다.

아희는 화단 옆 여분의 벽돌 더미로 달려갔다. 비료 포대를 보관하는 목적으로 지어졌던 그 공간은 늘 춥고 어두웠다. 겉이 굳은 흙먼지로 덮여있던 벽돌 하나를 집어든 순간 아희는 도서관에서 압정을 밟은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가슴속에서 심장이 부풀어 올라 몸통의 다른 장기들을 깔아뭉개는 느낌이었고, 한 번의 박동에 머리를 터뜨릴 것처럼 피가 솟구쳤다. 가슴을 찢는 통증에 숨을 쉴 수도 없어 눈물이 차올랐다. 대여섯 마리의 아기 주먹 만한 '검은 것들'이 벽돌 사이에서 천천히 털 덥수룩한 다리를 움직였다. 그들은 기름통에서 방금 기어 나온 것처럼 등에 윤기를 머금었고, 그중 한 마리는 긴 더듬이로 아래 벽돌의 생김새를 가늠하고 있었다. 맨 위에 있던 또 다른 것은 언젠가 자신의 집 지붕이 사라질 걸 알고 있던 것처럼 검은 비닐과 깨진 벽돌 표면에 난 길목으로 태연하게 기어갔다. 후미진 귀퉁이에서 누군가의 눈길을 한 번도 구걸한 적 없었던 움직임이었다. 경험과 시간이 베어든 편안함이었다.

입 안에 갇혀있던 숨이 마침내 새어 나왔다. 아희는 이미 어스름해진 놀이터에서 유독 짙게 그늘진 곳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녀는 손에 든 벽돌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민영이 걸어와 다른 벽돌 하나를 덥석 집더니 거미줄을 걷어내려 다른 손으로 휘저었다. 그때 벽돌 뒤에서 수백 개의 길고 부드러운 다리를 가진 뭔가가 그녀의 손등 위로 올라왔고, 팔을 뱅뱅 감았다. 그녀의 팔꿈치엔 하얗게 부패한 잎사귀와 죽은 나방, 거미줄 뭉치가 매달려 흔들거리고 있었다. 아희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것들이 온데간데 사라져 있길 바랐다.

"뭘 기대하셨어요?"

"네?"

굵은 빗방울들이 바닥에서 뭔갈 속삭이며 터져나갔다. 멀리서 작게 중얼대며 비닐 아래로 장난감을 쑤셔 넣는 여자뿐이었다.


비닐에 떨어진 빗방울들은 저마다 서로 다른 소릴 만들고 있었다. 민영은 큰 망고만 한 접이식 우산 기둥을 끝까지 펼친 뒤 눈높이까지 올렸다. 그리고 물이 샐 만한 틈은 없는지 박음질을 확인하려는 것처럼 접힌 우산의 원단을 한 장씩 넘겼다. 그녀가 턱을 비스듬히 틀자 순식간에 얼굴에서 형광등의 창백한 빛이 증폭하는 듯했다. 알 굵은 모래로 반죽한 듯한 두 뺨은 손가락이 스치면 자국을 남길 듯 푸석했고, 그림자도 거의 생기지 않았다. 그녀는 아희에게 우산을 내밀었다.

"저는 괜찮아요. 택시 부르면 되니까."

아희는 대화를 가지는 것뿐만 아닌, 그녀의 얼굴을 이토록 가까이서 보는 게 처음이었다. 힘 있는 광채가 도는 동그란 눈, 단단한 어깨에서 부서져 허리까지 폭포처럼 떨어지는 검은색 곱슬 머리카락. 통통한 뺨 사이의 곧은 콧대는 마치 밤바람에 납작 드러누운 풀잎들 가운데 홀로 서있는 나무 막대를 연상시켰다.

민영은 페인트 껍질이 거의 까진 평평한 난간 위에 우산을 올려놓았다.

"그래도, 혹시 모를 텐데."

침묵과 구별되기 어려울 만큼 잔잔한 목소리였다.

"오늘 생일인 거 들었는데."

"맞아요." 아희가 미소를 지으며 계단 디딤판 끝에 선 채 균형을 잡았다.

"오빠가 오랜만에 집으로 와요."

"여기서 멀리 살고 계세요?"

"네. 미국에, 아내랑 같이."

"정말 멀다. 기분이 좋으시겠어요."

사선으로 떨어지던 비가 수직으로 내리기 시작했다. 비닐로 덮인 모래장이 놀이터에서 가장 시끄러웠다. 아희는 옆을 슬쩍 보았다. 얼굴에 핏기가 없는 민영은 기계처럼 고갤 끄덕이길 멈추지 않았다.

"민영 씨도 가족들이랑 가끔 같이 시간 보내요?"

"가족?"

"혹시 어렸을 때 빠졌던 유치들, 가족들이 아직 간직하고 있어요? 7살이나, 8살 때."

민영은 아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갤 저었다.

"그렇구나, 제 건 어머니 보석함 안에 있어요. 그런 걸 참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기념하는 것."

바람이 불 때마다 울타리에 심어진 나무들이 타닥거리는 소릴 내며 부딪혔다. 제일 높은 우듬지가 물에 젖어 휜 바람에, 옆의 작고 꼿꼿한 나무에 자꾸 가지를 들이밀며 치근거렸다.

"아마 제가 어젯밤 꿈 내용을 적은 종이도 그렇게 오래도록 보관될 거예요. 액자 안에 질식한 채로, TV 옆이나 책장 위에서, 오빠의 것과 나란히."

"얘기는 들었는데, 그걸 정말로 기록하는 사람들이 있을 줄 몰랐어요."

"29살 마지막 날 꿈이잖아요. 어른으로서 진짜 마지막 꿈. 엄마는 읽고서 아침부터 눈물까지 보이셨어요."

"꿈은 끝나지 않아요. 그리고 아희씨 같은 사람들은..."

민영은 말을 하다 말고 회색 하늘에 그어진 검은 세 줄 같은 전깃줄을 올려다보았다.

"저도 알아요. 그 알약을 섭취하면 잠을 자는 것도 별로 달라질 게 없을 테고, 더구나 그런 흉측스러운 허깨비들이 꿈에 튀어나오는 걸 막을 수 있을 거예요."

아희는 잿빛 하늘에서 유난히 어두운 지점을 올려보았다. 잠시동안 이어진 침묵은 불편하지 않았지만, 주변 공기가 전과 달리 무겁게 느꼈다. 굳이 주목하기 싫었지만, 몇 분 전부터 주변에 산재한 썩은 고기와 암모니아 때문에 머리가 울리듯 아파왔다.

"선생님도 꿈에서 아직 그런 환영이나 헛것을 보세요?"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희는 고갤 돌렸다.

굳은 시멘트같이 거친 민영의 이마 밑으로 깊은 음영이 져있었고, 두 눈은 새까만 밤하늘에 샛노란 보름달 두 개가 떠있는 듯 생동했다. 아희는 숨을 죽였다. 그리고 눈에 띄지 않게 뒤로 손을 조심스럽게 뻗었고, 납작한 난간 살을 잡았다. 평생 우리 밖으로 나와있는 동물을 본 적이 없었던 사람으로서 심장이 평소와 다르게 뛰고 있는 걸 무시하기 힘들었다. 새의 꽁지깃이 등을 스친 것처럼 소름이 돋고, 종아리 근육이 단단하게 오그라들었다. 어린이집 같은 일터에서 발견될 법한 느낌이 아니었다.

움직이는 건 민영의 입술이었다.

"우린 여기에 있어요. 지금."

"무슨... 말씀이세요?"

아희의 머리카락 가닥들을 어깨 뒤로 넘긴 것이 바람일지 민영의 기운찬 콧김일지 불확실했다.

"삼천백 명."

"죄송한데..."

"어제 한국에서 머리카락 한 올도 남기지 않고 증발한 사람들의 숫자요."

아희는 눈을 피하거나 뒷걸음질을 해선 안될 거라 생각했다.

"지금 들이마신 그 숨. 그 숨이 어제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온 숨이라 생각해 본 적 있어요?"

민영이 자신의 귓불에 손을 가져가 맺혀있던 물방울을 닦는 와중, 눈의 드넓은 흰자 가운데에 작고 검은 그녀의 동공이 진동했다. 다만 턱 아래 물방울은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있냐고 물었어요."

"어떻게 제가 그런 걸... 일일이 다 생각할 수 있겠어요." 아희는 뒤로 한 계단을 올라갔다.

강한 바람이 비를 사선으로 내리게 만들었다. 방향을 튼 놀이터 성탑의 나무 깃발이 성가신 딱딱 소리를 퍼뜨렸다. 민영은 뒤로 한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다 온통 젖어요."

아희는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녀의 소매를 보고는 다시 내렸다.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오늘 오후부터 몸이 조금 이상했는데, 지금은."

민영은 벙벙한 아희의 반응을 놀리기라도 하듯 헐거운 소매를 흔들었다. 네 손가락들을 제외한 그녀의 엄지부터 손바닥, 그리고 손목까지 마치 성에가 낀 유리 장식물처럼 희미하게 뒤를 비추고 있었다.

"이제 대답해 줄래요? 당신한테 그 숨을 준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최민영 선생님..."

"내가 여기에 있을 동안이라도..."

민영은 다리를 비틀거리고, 텅 빈 소매를 휘적이며 계단 맨 아래까지 내려갔다. 순식간에 피로를 몰아내는 싸늘한 빗속에서 눈을 감았고, 온 방향에서 불어온 바람들을 만끽하듯 천천히 고갤 돌렸다. 기껏 해야 대여섯 개에 불과한 그녀의 표정들 속에서 벌새의 목덜미처럼 셀 수 없이 많은 색깔의 고통이 펼쳐졌다. 이윽고 제자리에서 발을 움직이고 돌면서 속삭였다. "그들은 죽은 게 아니에요. 매일 밤 그들을 만났어요."

허리춤에 놓여있던 그녀의 손이 다리 옆으로 축 늘어졌고,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던 한쪽 뺨이 드러났다. 맨 아래 계단에 걸친 그녀의 그림자가 사라져 갔고, 앙상한 가지처럼 뻗은 핏줄들은 투명한 젤리 같은 뺨 속에서 여전히 꿈틀거렸다.

"우리는 꼭 한 곳에서 다시 만나게 될 거니까... 내 품에서 작은 날개만 남겨두고 증발한 그날 그 아기처럼."

민영의 목소리라 할 게 거의 사라진, 그저 움츠러든 공기의 흐름이었다. 위장이 뒤틀렸다. 아희는 뺨에 떨어진 빗방울 두 개를 소매로 거칠게 비벼 닦은 뒤, 축축한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난간을 쥐고 있던 손을 펼치자 모든 손가락을 가로지르는 벌건 줄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제자리서 박동하고 있었다. 계단 위에 찍혀있던 흙 발자국이 비에 조금씩 녹아내렸다. 바닥에 떨어진 카디건과 남색 치마는 물에 잠겨 더욱 어두운 빛을 띠었다. 아희는 그곳에 혼자였다.



그러면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비를 몰고 있는 회색 구름들은 표백된 것처럼 가끔씩 하얗게 질렸다. 심장은 크게 쳤고, 천둥은 고요했다. 빗물과 땀이 더는 구분할 수 없을 것처럼 섞인 탓에 눈이 따끔거렸다. 아희는 달리길 멈추고 하얀 가로수 가까이 걸어갔다. 달아오른 얼굴 위로 맥박을 느낄 수 있었고, 발에 닿은 땅과 숨통도 같은 순간에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형태가 무너져 미역같이 흐물거리는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눈을 감으면 말 그대로 죽은 생선의 뱃속에 발을 집어넣은 듯한 촉감이었다. 달리던 동안에 10걸음 중 한 번은 꼭 신발 한 짝이 풀밭이나 도로변의 새카만 웅덩이로 날아가기 일쑤였다. 우산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대부분 결코 뛰지 않았다. 성급한 걸음이었다. 아희는 신발 뒤축에 검지를 단단히 고정했고, 오만가지 생각이나 걱정을 격멸하듯 신발 안에 발을 찔러 넣었다. 그리고는 선물들이 든 가방을 원통형으로 돌돌 감아 끌어안은 채 사람들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천막이 연속적으로 날개 치는 소리는 연발의 총성처럼 쩌렁쩌렁했다. 종류를 알 수 없는 검은 새들이 도망치듯 어수선하게 하늘로 날아올랐다. 아희는 고갤 조금씩 숙이고 땅만 보며 걷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미묘한 평안을 찾았다. 그들은 온종일 물속에서 시간을 보내다 마침내 땅 위로 다시 올라온 신비한 생명체들 같았다. 건너편 보도에도 비슷한 모습이 펼쳐졌다. 높고 어두운 굴다리를 향해 줄지어 나아가던 사람들 중 아무도 이마에 흐르는 물줄기들을 닦아내지 않았다. 전부 한 몸뚱이 었다. 누군가 고개를 들키라도 한다면 단연코 무리에 반기를 드는 것이었다. 그녀는 주변 아무에게나 손을 뻗고, 그 사람과 눈길을 주고받고, 따분한 저녁 계획에 대해 묻고 싶었다. 어떤 대화 주제든 개의치 않았다. 유리 표면에 입김을 불어 잔물결이 나길 바라는 기대로.

'고대 그리스에선 0을 숫자로 인정하지 않았어요. 1에서 1을 뺄 수가 없으니, 누구든 결국에 하나라도 지켜낼 수 있는 게 아닐까요?'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 말을 들어줄 사람은 없었다. 아희는 가방을 더욱 단단히 안았다.






이전 05화PM 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