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M 05:02

해피 30!

by 한운후



PM 05:02


모든 색조의 노랑, 또는 노랑과 비슷한 움직임들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피어나고, 지길 반복했다. 두더지 잡기처럼 시끄러웠다. 그들은 아무것도 주저하거나 두려워하는 법이 없었고, 보이는 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오늘은 어제처럼 삶의 단 한 하나뿐인 기회였다.

"안녕히 계세요."

아희는 아이의 노란 모자가 벗겨지지 않게 손을 대고 끌어안았다. 그리고 풀잎보다 보드라운 손등에 눈을 감고 입을 맞췄다. 선생들과 인사를 마친 아이들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거나, 부끄러운 웃음으로 두 손을 등 뒤에 감췄다.

"내일 보자."

아이들은 다시 돌아올 계획이 없는 여행길에 든 것처럼 손을 흔들었다. 먼저 버스에 탄 아이들은 유리창에 작고 고운 입김을 남겼고, 그 위에 손가락을 꼬물대며 한 뼘 크기의 메시지를 그렸다. 처진 누더기도 그 손에 잡히면 다음 날 가장 사랑받는 장난감이 되어 있었다. 하루가 즐거울지는 그들의 손가락 끝이 정했다.

선생들은 각자마다 울타리 위에 팔을 걸치고 생각에 잠긴 듯 눈썹과 목에 힘을 풀었다. 그들의 한숨은 바람과 방향이 같았다. 모두 흐린 하늘에 밝은 줄무늬가 진 서쪽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지평선이 도시 빌딩 모양의 가위날로 오려진 회색 종이 같았다.

버스의 시동이 켜지자 아희는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하루 종일 바람에 치인 모래들은 발 밑에서 마치 중국 민화 속에 나올 법한 둥글고 날카로운 구름 형태였다. 아직 내리기 전의 눈이 형성되는 단계에 놓인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한 걸음 옆으로 움직였다. 온종일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 후 찾아오는 그런 순간들이 좋았다. 눈에 보이는 사소한 것들이 카멜레온처럼 보고 싶은 대로 의미와 색깔을 뒤바꿨다.

"내일 월급날이네."

한 선생이 손톱으로 울타리 위를 두드리며 동조를 구하듯 옆을 돌아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소리 없는 웃음들이 대신 답했다. 버스가 내리막길 끝자락 모퉁이를 지나 완전히 사라졌을 때 몇몇은 기지갤 켜며 괴로운 신음을 냈다. 하루의 두 번째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아희는 뒤돌아 고갤 들었다. 몸에 스치는 잔바람에 색이 있다면 회색일 것 같았다. 습한 하늘에 양머리 모양 구름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딘가에 또 다른 양머리 구름이 기다리고 있으며, 그들 모두 외로움에 진절머리가 난 숫양들이란 상상에 웃음이 새 나왔다.

"뭐가 그렇게 웃겨요?"

비슷한 키, 비슷한 머리 모양, 비슷한 외양의 선생 네 명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생일이래요. 진짜 생일."

아희는 다시 앞을 보고 두 손을 모았다. 땅이 발에 세게 달라붙는 기분이었다. 가로로 줄지은 여덟 눈들이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서로와 닮아 있었다. 그녀는 방금 누가 어떤 말을 했는지 찾아낼 수 없었다.

"생일 축하해요."

그들은 안으로 들어갔다.

바람이 잔잔해진 사이 흙에서 시큼한 케첩 냄새가 올라왔다. 불 위에서 검은 기포를 터뜨리며 무너진 플라스틱의 증기처럼 냄새 이상으로 해로운 뭔가가 폐 안을 거칠게 휘저었다. 아희는 그저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만 걸었고, 놀이터 앞에 멈춰 섰다. 벽돌단 밖에 모래들이 아무렇게나 뿌려져 있었다. 그 자리에서 흙을 만지며 놀던 아이들이 누군지 또렷이 기억했다. 수정처럼 투명했다. 그들의 부모는 버스가 문을 닫고 매연을 내뿜으며 다시 출발할 때까지 포옹을 풀지 않을 것이다. 자식에게 손을 씻으라는 한 마디 말이 아직 권태나 습관에 지배당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아이가 경험한 환상적인 하루가 전부 이치에 맞는다 생각할 것이다. 그녀는 괘념을 떨쳐내기 위해 발로 흙을 쓸어 한쪽에 치웠다. 감촉과 소리가 희미했다. 아이에게 흙이지만, 어른에게 잿가루였다.

어두운 색을 띠는 단단한 흙에 박혀있던 노란색 플라스틱 장난감 삽 주변에 파란 나팔꽃들이 흔들거렸다. 새로 심어진지 사 일이 지난 것들이었다. 아희가 삽을 집어 들었고, 눅진한 흙 몇 뭉텅이가 바닥에 떨어져 검은 점들로 남았다. 겁 없는 아이들에 의해 온종일 차이고, 빚어진 두 평 짜리 작은 사막 위로 작은 물방울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속눈썹에 내린 하얀 이슬들이 제 몸집을 키워나갔다. 그녀는 손등으로 눈을 비비고는 화단 옆으로 걸어가 벽에 기대어 있던 끌개를 집었다. 그리고 모래장의 작은 언덕들을 허물었다. 끌개가 모래를 뒤엎고 지나간 곳엔 곧은결들이 남았다. 날카롭게 튀어나온 쇠 갈래들에 굴복한 언덕들. 그들은 서로 구별할 수 없이 똑같은 모양의 직선들로 변했고, 낮잠의 숨결 한 번에 맥이 끊겨버릴 것처럼 연약해 보였다. 그들은 한 곳에 오밀조밀 모여 있어야만 살아남을 거라 믿었다.

한 선생이 건물 입구의 차양 아래로 나와 손을 흔들었다.

"아희씨! 전화받으러 들어와요. 그리고 어차피 내일 모래장에서 아이들 보물찾기 할 거라서 따로 정리할 필요 없어요."


그녀의 휴대전화가 놀이실 의자의 인조가죽 방석 위에서 악을 쓰며 진동하고 있었다. 심지어 바닥의 먼지조차 살짝 위로 떠올를 것만 같았다. 2층 환복실은 수다와 웃음소리로 떠들썩했다. 아희는 컴컴한 위쪽 계단을 살피고는 그림이 걸려있지 않은 복도의 빈 부분에 등을 기댔다.

"생일 축하 합니다, 생일 축하 합니다. 사랑하는..."

건조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잠시 멈췄다. 고갤 숙인 그녀는 눈을 감고 속으로 숫자를 셌다. 가볍게 콧웃음이 흘러나왔다.

"내 여 동 생... 생일 축하 합니다."

"많이 피곤해 보이네. 할아버지 목소리처럼 들려."

"잘 지냈어?"

"응, 그럼."

아희는 마치 그가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고갤 끄덕였다. 에둘러 뱉어낼 말이 더 떠오르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을 슬프게 받아들이려 하지 마. 다 괜찮을 거야."

네 살이 더 많은 오빠는 고작 두 마디 대답으로 속마음을 알아차리는데 쌍둥이나 다름없었다.

"나도 알아. 고마워." 아희가 양말 끝 봉제선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어디 즈음이야?"

"집에 거의 다 도착해 가. 미정이는 아까 공항 나와서 택시 시트에 머릴 뉘이자마자 바로 잠들었고. 아무리 락-슬립이라도 임산부한테는 무용지물인가 봐. 발좀 주물러 달라고 나를 다섯 번은 깨운 것 같아."

"그럼, 이제 곧 7개월인데. 많이 고될 거야."

LA에 사는 그녀의 오빠는 근래에 완공된 새 집에 만족했다. 방음에 특화된 건축 철학이 녹아든 탓에 '필로우 캐슬'이란 유아적인 이름의 고급 주거 단지였다. 구역에서 나오고 들어가는 모든 통행자는 반드시 두 단계의 생체 인증을 거쳐야 했고, 그의 묘사에 따르면 주거 단지 테두리를 따라 40대 아빠들이 수영장에서 쓰는 에어 매트리스처럼 생긴 거대한 회색 벽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러면... 해는 잘 들어?"

"벽들이 알아서 움직여. 그런 걸 다 고려해서 지어졌어."

아희는 소음 문제와 치안으로 지난 몇 년 동안 고통을 겪던 그를 위해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었다.

"마치 '우리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동안 너희가 푹신한 침대 위에서 두 다리를 쭉 피고 휴식을 취한 대가야!'라고 호소하는 것 같아. 그게 아니면 뭐겠어. 다만 적절한 용어나 조치를 찾을 만큼 그들이 똑똑하지 못해서 가장 쉬운 선택을 한 것이겠지." 그가 생색내듯 말했다.

수 십 년째 사회 극빈층을 따라 중산층 삶의 중심도 점점 밤에 가까워지는 미국 사회도 이제는 새로운 화두가 아니었다. 아희는 오빠가 전화 너머로 이런저런 불평을 늘여놓던 지난날들을 회상했다. 사방으로 뿜어진 화염과 파티용 반짝이 가루, 땀에 젖어 들썩이는 맨질맨질한 어깨들, 해가 지면 뒤에 수많은 알루미늄 캔을 매단 채 조용한 주택가만 찾아서 질주하는 오토바이 무리. 심술궂은 행진 이야기도 빼먹을 수 없었다. 손잡이 없는 냄비를 세차게 두들기는 쇠국자, 혹은 무고한 2층 가정집 창문을 향해 빛을 쏘는 고휘도 전등 등. 오빠의 증언과 별개로, 그녀가 보고 들은 사실들로 상상한 건 브라질 리우 카니발의 모습을 하고있는 절망의 밤축제와 같았다. 같은 밤을 다르게 마주할 수 밖에 없는 두 부류의 사람들 사이에서 탄생한 순수한 질투 때문이었다.

"내가 잠을 잘 수 없다면 다른 사람들의 이불도 훌렁 뒤집어 버리겠다는 의지야. 꼭 식당 주변의 성가신 비둘기들처럼 행동한다니까. 온 세상 침실이 온전히 남아나지 않겠지, 언젠가 그러다 보면."

냉랭한 적개심이 녹아든 목소리였다. 그는 더 이상 벼랑 끝으로 스스로를 내모는 부류의 사람들을 동정하지 않았다. 냉소 어린 그의 비유에 따르면, 그들은 자기 파괴에 가까워지는 선택을 반복하는 가여운 실험용 쥐와 같았다. 아희는 그가 미처 다 말하지 못한 나날들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을 거라 생각했다. 오래전 교회의 무료 급식소 텐트 아래에 앉아 함께 후원금을 모금하곤 했던 그의 앳된 미소가 떠올랐다.

"결국 모든 게 다 그 알약 때문이야?"

"따지고 보면 그래. 그래서 더 아쉽고. 그 비싼 '락-슬립'이 앞으로도 얼마나 생산되고, 얼마나 더 비싸질까 아무도 확실히 예측할 수 없어."

"다른 회사 제품들은?"

전화기 너머에서 정적이 흐르더니 콧웃음 비슷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오빠가 한 최선의 대답이었다. 그녀는 오늘 하루 동안 마주했던 하품들을 떠올렸다. 창가로 쏟아지는 대낮의 젖빛 섬광 속에서 일어난 그들의 간절한 표호. 그 순간 모두가 진공 속에 있었던 것일까.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우리는 밤을 어떻게 맞이해야 해?" 아희가 나지막이 물었다.

그때 한 무더기의 박장대소가 계단 위로 쏟아져내렸다. 모든 선생들이 허파에 숨겨둔 접시들을 동시에 바닥에 내던지기로 약속한 듯했다. 참을 수 없는 웃음의 한 음 한 음은 똑같은 길이와 높이로 공명했다.

"무슨 뜻이야?"

아희는 계단 위쪽을 살피더니 다시 고갤 돌렸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집에서 만나."

"그래, 오늘 아침에 그건 써 뒀어?"

"응. 집에 먼저 도착하면 읽어 봐도 좋아."

"분명 어머니가 액자에 맞춰 두셨을 거야. 알겠어, 집에서 보자."

선생들의 옷차림과 화장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눈썹들은 전보다 하늘에 가까워져 있었고, 머리카락은 마구간을 뛰쳐나온 말들의 꼬리 같았다. 그들은 마치 대저택의 입구에 있는 가로로 긴 복잡한 문양의 철제 대문처럼 서로의 팔과 팔을 꼬아 행진했다. 아희는 복도의 한쪽 면으로 바짝 몸을 붙어 섰다. 한 곳에 뒤섞인 장미와 농익은 라벤더, 알싸한 오렌지 블라썸 향기가 어린이집을 안팎으로 뒤집었다. 그 인공적 체취는 천장, 간식 탁자 아래, 그림 그리는 방, 그리고 현관 바로 앞까지 행진의 발걸음에 맞춰 가득 퍼져나갔다. 향의 그림자조차 그들 자신의 향을 뽐내려는 듯 강렬했다.

온종일 원장실 안에 박혀 있었던 행정 직원이 걸음을 멈추더니, 서둘러 단단한 반원 모양 초록 타조 가죽 핸드백을 뒤적였다.

"이거 받아요, 아희씨."

흰 리본으로 싸인 작고 검은 상자였다.

"생일 축하드려요. 손목시계예요. 지난주에 선생님들이 백화점에서 직접 고르셨어요."

"정말 감사해요. 근데 이런 거 안 해주셔도 되는데."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요. 내일 뵐게요."

상자를 받은 아희는 어깨를 웅크렸다. 닫히는 문틈으로 정수리만 가린 채 빗속으로 뛰어드는 다른 선생들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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