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30!
차갑고 센 바람이 굴다리 아치를 통과하자 차도의 버스와 세단들이 제자리서 흔들거렸다. 버스 승객들은 유리창 가까이 얼굴을 가져가 회색 구름의 거친 파도를 관찰하거나, 길가의 벽에 몸을 붙이고 기다리는 행인들을 애타게 바라보고 있었다. 거친 콘크리트 벽에 오른쪽 볼을 거의 붙인 채 걷던 한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흠뻑 젖어 온화한 광택을 머금은 코트가 여자의 흰 하이힐에 마구 짓밟히고 있었다. 그녀는 목적지를 망각한 사람처럼 바짝 세운 손톱들로 벽을 움켜쥐려 했다. 아희는 놀란 거미의 다리처럼 곧게 핀 그녀의 손가락들을 보았다. 그렇게 죽고, 날이 개어도 그 거미는 벽에 매달려 있을 것 같았다.
수평으로 휘날리던 흑단발 머리카락이 가라앉았을 때 아희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앞으로 한 발도 내밀지 못할 얼굴빛이었다.
"굽이 너무 높아요! 서두르지 마세요!" 아희가 소리쳤다.
비가 멈춘 것일 수 있었고, 바람이 물방울들을 더 멀리 날려버린 것일 수도 있었다. 다시 돌풍이 몰아쳤고, 벽에 매달렸던 그녀의 손톱 중 하나가 검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서두르지 말고, 제발..."
젖은 모래알과 나뭇잎 같은 찌꺼기들이 바람을 타고 날아다녔다. 갑자기 얇은 뭔가가 날카롭게 찢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동시에 아희는 눈을 가시로 찌르는 듯한 따가운 통증을 느꼈고, 차가운 손으로 황급히 얼굴을 덮었다. 피가 흘러내리지는 않았지만, 각막이나 눈꺼풀 피부가 뜯겨 나간 것처럼 뜨거운 이마에 맥박이 쳤다. 정체 모를 소리를 들은 뒤로 함께 걷던 수많은 어른들의 속삭임들이 전보다 훨씬 분명하게 들렸다.
하이힐을 신은 여인이 벽에 기대어 다리를 오들오들 떨었다. "저것 좀 봐요." 빗물에 허연 화장이 성기게 씻겨나간 얼굴로 굴다리 아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굴다리 겉에 둘러져 있던 하얀 방수포 일부가 종이처럼 찢어져 높은 허공에 휘날렸다.
아희는 그녀의 눈가에 주름이 깊고 어두워지는 걸 볼 수 있었다. 이제까지 눈을 보호하던 반투명한 막이 찢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주변 모든 광경이 더 환하고 선명했다. 그 여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빨강. 습한 날 저녁 하늘의 노을의 색. 피의 색. 길고 얇은 뭔가가 반으로 갈라지는 날카로운 소리들이 차도를 따라 연이어 메아리쳤다.
다리를 칭칭 감고 있던 밧줄 하나가 풀리더니 창틀에 머리만 낀 뱀처럼 허공에서 사납게 꿈틀댔다. 여러 겹의 방수포들은 바람을 한가득 삼켰고, 곧 마술사의 날숨을 맞은 카드들처럼 차례차례 날아가기 시작했다.
"세상에나."
여인이 벽에서 몇 걸음 떨어졌다. 두 손으로 입과 코를 틀어막고.
다리는 겉에 손수건 하나 걸치고 있지 않았다. 목마른 시선들이 다 따라가지 못할 만큼 붉은 그림들이 모든 곳을 에워싸고 있었다. 간단했다: 벌거벗은 붉은 거인이 도시 한 복판에 무릎을 꿇은 채 나타났다.
"자, 자! 여러분들 너무도 하신다. 어서 가던 길이나 걸어갑시다! 새삼스럽게 왜들 이러실까, 다들 어차피 매일 밤 보는 것들이면서."
은색 정장의 남자가 한쪽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헛기침을 뱉으며 사람들 사이로 지나갔다. 태연한 외침과 다르게 걸음은 분주했다. 아희는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눈앞에 있는 게 아닌, 옆에서 자신과 함께 똑같은 걸 목도하는 어른들 때문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널리 파동 하는 붉은 형상들이 차라리 대낮에 나타났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눈치였다. 결국 보이는 귀신이 덜 무서운 법이었다.
아희는 붉은 거인에 눈을 고정한 채 더 가까이 다가갔다. 바람은 멈추었고, 비는 속삭이듯 내렸다. 움직이는 건 그녀 혼자였지만, 어디선가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한 걸음에 또랑또랑한 소리가 세 번은 울렸다. 고개를 돌려가며 주위를 살핀 아희는 맑고 가벼운 그 소리 끝에 쓸쓸함이 묻어있다 생각했다. 보이지 않는 신비로운 소리가 우두커니 서있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빛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빨간 스프레이 페인트나 스텐실 방식으로 남은 벽화 속엔 붉은 비명들도 함께 봉인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끓어오르는 피와 체액으로 마치 다리 전체를 피범벅이 된 것처럼 보이게 하려던 목적 같았다. 거인의 어깨부터 팔, 다리까지 뒤덮은 문신처럼 보였다. 투명한 뭔가에 갇혀있는 사람의 얼굴에서 격한 감정을 묘사하는 정교한 부분들을 빼면 하룻밤 동안에 몇 사람들이 힘을 모아서 그려낼 만했다. 아희가 몇 걸음 더 나아가 고개를 추켜올렸다. 내부가 튀겨진 핏물로 흥건한 투명 캡슐들은 하나하나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 보였다. 누구든 어른들 사이의 비밀을 염탐하기 시작하던 어린 시절부터 막연하게 알고 있던 형태와 색, 그리고 느낌들. 그녀가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귓바퀴가 닳도록 들어왔던 장면들. 눈을 비비고, 여러 차례 힘주어 깜빡였다. 그건 14살 때 처음으로 파리에서 봤던 에펠탑의 놀라운 진부함과 닮아 있었다.
독립적인 각각의 둥근 캡슐들 속엔 벌거벗은 사람이 한 명씩 새우처럼 몸을 둥글게 웅크리고 있었다. 30대의 몸, 혹은 60대의 얼굴. 요람 속 아기의 자세로, 피부는 마치 아르헨티나 와인처럼 짙은 보랏빛이었다. 팔을 들 정도의 기력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사람들은 녹슨 동전처럼 노란 눈으로 바깥을 노려보았다. 매끈한 내벽에 흠집이라도 내려는 것처럼 피에 젖은 손바닥을 데고 있었다. 수 백 미터 떨어진 곳의 어떤 행인이 만약 이 알약 모양 유리 탱크들을 발견한다면 흔한 간식가게 쇼윈도에 진열된 줄줄이 체리 사탕이나, 한 다발의 헝가리식 소시지라 생각할 수 있었다.
다리 한쪽 끝에서 대여섯 명의 흰색 전신슈트를 입은 요원들과 그림을 보기 위해 가던 길을 멈춰 선 사람들이 소란을 벌이고 있었다. 요원들이 서로에게 다급한 손짓을 하며 여분의 방수포를 이리저리 펼치는 와중에도 행인들은 주변을 서성였다. 보려는 자들이 비둘기라면, 막으려는 자들은 그들에게 포악한 발길질을 해대는 사람들이었다. 팽한 날카로운 단발의 호루라기 소리가 다리 위에서부터 차도와 인도까지 스쳐 지나갔다. 방수포를 들춰보던 어느 중년 부부는 목을 푹 숙인 채 그림 주변을 잽싸게 돌아갔고, 경찰들이 자신들로부터 얼마나 멀리 있는지 가늠하려 목을 쭉 내밀었다. 부부는 요원들이 흰 팔을 휘휘 저어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두 손을 등 뒤로 가져갔고, 눈만 깜빡거렸다.
가늘고 찬 물방울들이 눈가로 떨어졌고, 아희는 고갤 숙였다. 얕은 웅덩이에 빠져있던 자신의 발이 더는 주위의 다른 발들과 구별되지 않았다. 수 백개의 몸부림, 단 하나의 감정 때문에 아무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피하지 않았다.
'우리는 꼭 한 곳에서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
그녀는 민영의 마지막 말을 되뇌다가 돌발적으로 사람들이 덜 붐비는 계단으로 걸어갔다. 공기에 뭔지 모를 텁텁한 사과 식초의 향이 입 안까지 맴도는 탓에 배를 쥐어짜듯 힘을 주었다. 숨을 가득 들이마셨고, 입술이 하얘지도록 참았다. 어제 마주친 낯선 누군가의 날숨은 그래 봐야 노폐물에 불과하다 곱씹으면서, 혀 끝의 신맛은 그저 환각이라 믿었다. 위쪽으로 이어진 길을 향해 두 다리를 교차하며 다가갔지만, 다리는 멀게만 보였고, 행렬은 조금씩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다리는 점점 삶은 국수 가락처럼 풀려갔고, 가슴은 북처럼 쿵쾅거렸다. 마치 누군가 숨어서 그녀의 사소한 행동까지 다 지켜보고 있는, 혹은 그녀 자신이 가장 높이서 모든 상황을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그때 신발 앞코가 보도블록을 뚫고 솟은 나무뿌리에 걸렸고, 그녀는 쓰러지지 않으려 어떤 남자의 젖은 버건디색 코트를 거칠게 밀었다. 같은 순간 청량한 쇠방울 소리들이 빠르게 기둥처럼 서있는 사람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맹렬한 땅바닥이 얼굴에 달려들 때까지, 그리고 의식의 촛불이 꺼지는 순간까지, 오로지 아희는 방울 소리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그게 곧 사라져 절대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괜찮아요? 구급차가 오고 있으니 잠깐만 기다려 봐요."
하얀색 하이힐 한쪽이 아희를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눈을 한 번 깜빡인 동안, 어느새 굴다리는 다시 겉에 하얗고, 얇은 방수포를 입고 있었다. 하늘은 더욱 깊고 어두워 보였다. 발걸음 소리는 전에 비해 뜸해졌고, 거리는 마치 늦가을 밤이나 새벽 시간 같았다. 그녀는 잠시 회상의 시간을 가지거나, 몸을 일으킬 새도 없이 두 손을 서둘러 눈앞에 내보였다. 왼쪽 약지부터 오른쪽 약지까지, 한 번에 하나씩 구부렸다. 손을 뒤집고, 인대 위에 걸친 피부의 주름을 읽었다.
아희는 자신을 둘러싼 다른 사람들의 발들을 하나씩 훑었다. 각자가 제자리서 조금씩, 초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목 아래부터 무릎까지 낯선 이의 옷이 덮여있었다.
"안색이 너무 창백해요."
"저는 괜찮아요." 그녀는 이마를 문지르며 은은한 바다 소금의 향을 풍기는 버건디색 코트를 집어 들었다. 그녀가 몸을 일으켜 계단에 겨우 앉았을 때 한 손에 가방을 들고 서있던 남자가 말했다.
"입고 계세요, 온통 젖었어요."
그녀는 굳은 미소만 보이며 코트를 고이 접었다. 그리고 구김 하나 없는 흰 셔츠 차림의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남자는 한쪽 발로 다른 발보다 높은 곳을 디딘 것처럼 상체가 기울어 있었다. 몸 어딘가가 상한 병사처럼 목과 턱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의 입술이 움직이지 않아도 주변의 공기가 진동했고, 광대뼈까지 처진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튀어나온 콧날은 힘 있는 두 눈을 각각 빛과 그림자 속에 머물게 했다. 영원과 같았던 몇 초 동안, 그녀는 스스로가 전에 해본 적 없는 행동을 하도록 두었다. 거울을 빤히 보듯 낯선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 행동의 동기는 깨닫기에 너무도 깊이 있었다. 익숙하고, 두려운 기분이 밀려왔다.
"정말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되겠어요?"
그의 입술이 움직인 순간 아희는 곧바로 고갤 돌렸고, 일어나며 오직 여인의 새하얀 하이힐만 쳐다보았다. 남자는 망설이듯 코트를 받아 들었다.
"괜찮습니다. 감사해요."
"별말씀을요."
그녀는 천천히 계단을 밟았고, 한 뼘씩 위로 올랐다. 딸랑이는 경쾌한 방울소리가 뒤를 따랐다. 남자가 코트를 구겨진 채 비틀대며 한 번에 계단을 두 개씩 딛고 있었다. 아희는 흘깃 뒤를 보고는 더 빠르게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흰 방수포 위에 올라선 그녀는 재빨리 몸을 틀어 뒤돌았고, 얼굴을 찌푸렸다. 어느새 뼈까지 파고든 한기가 뒤늦은 두통을 일으켰다. 그녀는 어깨에 가방을 들쳐 맨 채,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커져가는 쇠방울 소리를 듣고 있으니 목구멍까지 차오른 비명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잠깐만요!" 남자가 소리쳤다.
머리 위로 번쩍 들린 가방에서 물방울들이 떨어졌다. 아희는 이마에 흐르는 물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몇 초 동안 앉은 것도, 선 것도 아닌 남자의 엉성한 자세만 노려보았다. 남자는 곧 무심한 표정을 보였다. 그는 고갤 기울여 자신이 서있던 다리 밑으로 시선을 던졌고, 다시 아희의 가방을 올려보았다.
"정말 높네요."
그가 하얀 리본이 묶인 검은 상자를 내밀었다.
그 순간 아희는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여러 명이, 가만히 멈춰 서서. 그녀는 그들이 조용한 환호를 할 게 뻔할 거라 추측했다. 자신들이 걷던 따분한 길을 멈추게 만든 뭔가가 더더욱 과격해지길 바랄 거라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보이지 않는 먼지, 혹은 투명한 공기 따위로 여기며 누군가를 뚫어져라 관망하는 그들이 싫었다.
"저기요?"
맑은 방울 소리가 다가왔다. 아희는 가로등 불이 비추는 자리에 남자의 두 발이 꼼짝도 않는 걸 확인한 뒤에 천천히 가방을 내렸다. 그에게 선물 상자를 받았을 때 다시금 주변은 따분한 발걸음 소리들로 채워졌다.
"제 이름은 무현입니다."
"죄송해요, 저는..."
"얼마 전부터 매일 비슷한 시간에 여길 건너시는 걸 봤어요. 가끔 예화역에서도."
아희는 고갤 들었다. 그는 굳은 미소로 황급히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었고, 뭔가를 찾으려는 듯 휘저었다. 그녀는 가방의 열린 지퍼 틈새에 눈을 떼지 않았다.
"이 거 쓰세요. 마른 거예요."
무현이 주머니에서 자잘하고 옅은 파란색 꽃들이 그려진 손수건을 꺼냈다.
"고맙습니다."
"이 동네 주변에서 일하시나 보네요?"
"네. 여기 근처에."
입과 코를 스친 얇은 손수건이 금세 휴지처럼 젖어들었다. 그 사이 두 발은 보도와 한 덩어리로 굳어버린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젯밤 우리 꿈에 나타난 천사들 기억하시나요?"
대뜸 다가온 그의 가방 안에서 또 한 번 균일한 방울 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떤 사람은 그게 빛줄기라 말하던데, 아니면 무지개. 그게 뭐든, 수 천 개의 붉은 구슬 다발 뒤로 나타난 빛이 너무도 영롱했어요. 저는 이제까지 그런 걸 본 적이 없었거든요."
남자는 긴 하품을 하고는 옅은 웃음을 보였다.
"별안간 그게 떠올랐어요. 궁금하잖아요."
"아직 저는."
"아!"
그는 놀라고 미안한 얼굴로 자리에서 한 발 물러났다.
"죄송합니다. 그러면, 아까 다리 위에서 그 사람들이 뭘 하고 있었는지 아시겠어요?"
그가 곧은 손가락으로 다리의 한쪽 입구를 가리켰다.
수백만 개의 입사귀들이 떠는소리가 뒤에 한 차례 바람이 불어왔다. 아희는 길게 숨을 내쉬며 두 팔을 손으로 비볐다.
"맞아, 아직 모르는 게 당연할 텐데. 걱정하지 마세요."
그가 애써 가벼운 웃음을 보이며 가방 손잡이를 세게 거머쥐자, 가방에서 방울이 잘그락 움직였다. 그는 한 자세를 유지하기 어려운 듯 보랏빛으로 물든 산등성이를 바라보며 앞으로 반 걸음씩 절뚝였다. 방울 소리들은 점차 세게 떨려왔다.
"이상할 것 없어요, 어차피 다 경험으로 알게 되실 테니까. 제가 어릴 적 처음 공몽(共夢) 현상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아마도 오늘부터 보일 것 같네요."
아희는 그의 말을 끊으며 뒤돌았고, 다리길 끝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오로지 앞을 향해서, 살아있는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며. 다리 밑도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나무가 흔들거렸고, 걸음은 일정했다. 바람이 귓바퀴를 맴돌다 도망갔지만, 머지않아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돌아와 속삭였다. 잠깐만 걸음을 멈추라고. 뒤를 돌아보라고. 한순간 그녀의 머릿속엔 자신 혼자 남아있었다. 멀리서 남자가 한 발로 땅을 디디는 소릴 들을 때마다 어수선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방울 소리가 강해질수록 소음은 죽어갔다.
그녀는 우뚝 멈춰 섰다. 무현이 절뚝이며 옆을 지날 때 비스듬히 올려다보았다.
"다리 괜찮아요?"
그는 대답 대신 허리를 짚은 채 고통이 조금 섞인 얼굴로 되물었다. "오늘이… 생일이시죠?"
"맞아요."
"그러시구나."
무현이 코트를 넓게 펼쳐 순식간에 그녀의 어깨에 걸쳤다.
"역으로 가실 것 같은데. 저도 그렇고요."
아희는 고갤 한 번 끄덕이고 젖은 손수건을 입술로 가져갔다. 마음에 아무것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은은하고 투명한 향이 나돌았다.
"그들은 그림을 완벽히 가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걸까요? 고작 흰 덮개 몇 장으로?"
무현이 턱을 까닥거리며 코웃음을 쳤다. 바닥에 있던 젖은 나뭇가지를 걷어차자 방울 다발이 한 차례 울리며 선명한 잔향이 이어졌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이 정리되지 않은 듯 초조한 손으로 넥타이 깃을 주물럭 거렸다. "그리고 벽화엔 빨간색이 지나치게 악랄한 의미로 쓰인 것 같았어요. 끔찍함도 과장되었고. 그나마 우리의 꿈과 가장 비슷했던 걸 고르자면, 투명한 유리구슬마다 안에 다양한 사람들이 그려져 있던 부분이겠죠."
그가 마치 눈앞에 형상이 보이는 것처럼 펼친 손을 옆으로 움직였다. 아희는 천천히 그의 옆을 거닐며 잔디밭 가장자리 연석에 걸쳐 있는 나뭇가지만 쳐다보았다. 다리의 그림에 대한 기억은 그가 묘사하는 것보다 흐리게 남아있었다.
"항상 참혹한 지옥을 떠올릴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해요. 실제로는 구슬 다발 속에 갇힌 사람들이 다 함께 움직일 때도 있으니까. 꼭 신비한 전야제를 보는 기분이에요."
무현이 눈을 찡그리며 오른쪽 관자놀이를 지긋이 문질렀다. 아희는 염려스러운 눈으로 그와 그의 발목을 살폈다. 온몸 구석구석마다 수수께끼를 숨기고 있는 사람 같았다.
"헛디뎠어요." 그가 주먹으로 골반을 툭툭 치며 말했다.
"어디서요?"
"높은 어딘가에서요."
아희는 멍하니 앞만 보았다.
"그나저나, 혹시 그 아저씨 아세요?" 무현이 물었다.
"누구요?"
"광장에서 하루 종일 사라진 사람들의 이름을 소리 지르는 아저씨."
그가 신이 난 듯 손을 허공에 움직이며 말을 꺼내자, 아희는 약간 걸음을 늦췄다. "네, 그 남자가 전에 가슴이 찢어지는 일을 겪었다는 사실은 들었어요. 쌍둥이 아들들을 동시에 잃었다는."
"비극이죠. 예전에 그 아저씨가 밤 11시를 지난 시간까지 명단을 읊던 걸 본 적이 있는데, 끝에 가서는 그분의 목소리가 마치 낫으로 바위를 긁는 것처럼 변해서 듣는 것도 고통스러웠어요. 제가 정확히 기억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그전 날이 한국인 임의 증발자 수가 역사상 최대를 기록했던 날이었죠."
아희는 고갤 끄덕였다. 아빠의 급작스런 승진 소식에 축하 파티 겸 새 영국 승용차를 계약하러 부모님을 따라 외출했던 날이었다. 그녀가 7살 때부터 '주은이 이모'라 부르며 따르곤 했던 식모가 말도 없이 일을 나오지 않았던 날과 같은 날이었다. 대신 생쥐처럼 재빠른, 낯선 여자가 그녀 집을 방문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무현은 입가로 손을 가져가 확성기를 든 남자를 흉내 내듯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
"끓어오르는 체액! 새빨간 비명들!" 그는 눈을 꽉 감았다. 그리고 절고 있는 반대쪽 다리로 더욱 세게 바닥을 디뎠다.
방울은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