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30!
아희는 따스한 가로등이 머리 위를 지날 때마다 조용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낯선 그와 함께 보냈을 지난날들을 상상했다. 열차의 문을 나서며 서로의 어깨를 스치고, 같은 계단을 따로 올랐다. 두 사람은 각각 지갑을 꺼내려 속주머니나 가방에 손을 넣었고, 우산을 필 때 서로 등을 졌다. 수많은 아침들 중 최소한 한 번은 예화역 주변에서 그와 같은 바람을 맞고, 같은 경적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둘은 같은 초록불을 기다리며 같은 가로수 그늘에서 해를 피했다. 그는 바로 내 옆에 있었다. 그때 나는 왜 그저 앞만 봤을까.
무현이 걸음을 멈추고 가방을 든 손을 바꿨다. 가방에서 방울들이 찰랑이는 소리가 텅 빈 광장에서 멀리 떨어진 극장까지 퍼져나갔다. 바람도 불어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희는 신발 젖은 나뭇잎들을 떼어내기 위해 신발 앞코를 땅에 비비며 희미한 불빛이 흔들리는 검은 웅덩이를 내려보았다. 그리고 주변 불빛뿐만 아니라 내일의 햇빛마저 벌써 집어삼킨 듯 탐욕스러운 입 모양이라 생각했다.
"벌써 들어가셨네. 비가 멈춰서 뵐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가 탄식했다.
아희는 광장을 둘러보았다. 어스름한 불빛이 위로 솟는 지하철 출구에서 꿈틀거리는 검은 두 사람의 실루엣 외에 아무도 없었다.
"내일도 분명 나오실 거예요."
"그러실까요?" 무현은 텅 빈 단상을 바라보고 말했다. 방금 전까지 그의 눈 안에서 일렁이던 활기는 촛불 심지의 작은 불씨 같았다.
"읊어야 할 이름들은 계속 나타나니까."
"그렇죠."
그가 다시 걸음을 내민 순간 팔을 휘저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겨우 땅을 손으로 짚을 수 있었지만, 한쪽 발목이 장난감 관절처럼 뒤로 휙 돌아가 있었다. 아희는 그의 팔을 잡고 일어서는 걸 도왔다.
"병원으로 가셔야 해요."
무현은 아무 말 없이 빠르게 고갤 끄덕이며 바짓단을 잡아 내렸다.
"가방 안에 뭐가 들었는지 물어도 돼요?"
그는 곧바로 입술 아래 주름이 잡히는 미소를 지었다. 놀라서 방어적으로 보이는 반응이 아닌, 정말로 기쁜 얼굴이었다.
"제 가방에요?"
"움직일 때마다 왜 안에서 그런 방울 소리들이 새어나는지 궁금해서."
"왜 그런지 말해줄게요."
무현은 온종일 누군가 그 질문을 해주길 기다렸다는 듯 턱을 들어 올려 넥타이 매듭을 고쳐맸다. 그리고는 젖은 검은색 가죽 서류가방을 들어 올렸다. 제멋대로 모가 난 바위 조각이 안에 든 것처럼 가방 중앙이 한껏 부풀어 있었다. 그는 가방을 살며시 흔들었고, 바람에 서로 부딪치는 유리 젓가락들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는 부자 고객들을 주로 상대하는 고급 장난감 외판원입니다."
아희는 젖은 머리를 한쪽으로 정리하며 그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 그가 소리 없이 웃었고, 눈썹 사이에 공허하고, 슬픈 주름이 생겼다.
"미안해요. 농담이었어요. 어떤 부자가 자기 자식들 장난감을 현관에서 고르게 하겠어요?"
"괜찮습니다."
아희는 홀로 걸음을 떼었다. 또다시 뒤에서 불안한 쇠방울들이 떼 지어 합창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녀는 무현이 따라올 수 있을 만큼 속도를 늦췄다.
"이게 뭔지 알아요?"
그의 손이 얼굴 옆으로 튀어나오자, 아희는 화들짝 옆으로 물러났다. 그녀는 그의 손 끝에 올려진 금빛 방울 하나를 응시했다. 밑엔 3cm 남짓 되는 빨간색 리본이 달려 있었고 실제로 묶인 끈이 아닌, 천 조각들끼리 본드로 엉겨 붙은 중국제 나일론 리본이었다. 그가 조그만 황금색 총알 같은 방울을 움직일 때마다 리본이 따라서 흔들거렸다. 소리는 강렬하고 톡 쏘는 느낌일 거란 그녀의 기대와 달리 미미하고, 하찮았다.
"씨앗이에요. 되게 시끄러워서 무시하기 힘들고, 짜증 나게 만들기도 합니다."
무현이 잠시라도 그녀의 주의를 놓치지 않으려 공중에서 방울을 움직이는 동안, 아희는 그의 얼굴에 흔들리는 선들을 관찰했다.
다.
"근데 자꾸 생각나게 만들어요. 좋은 의미에서. 당신이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없도록 꼬드겨요."
낯익은 얼굴이었다. 그녀가 아침에 깼을 때 남은 기억 파편들 중 어젯밤 꿈에 나타났던 한 남자가 있었다.
"당신을 궁금하게 만드는 씨앗이에요."
그는 자랑할 게 더 있다는 듯 가방을 들어 올렸고, 반대 손으로 지퍼를 꽉 움켜쥐었다.
"시간이 많이 늦은 것 같은데..."
아희는 지퍼를 잡고 있는 그의 손을 지켜보며 입술을 움찔댔다. 그리고 상상했다. 가죽 벽에 둘러싸인 채 조그마한 공간에서 더 비좁은 지퍼의 열린 틈새로 나갈 기회를 엿보는 수백 개의 황금 방울들을. 각각이 표면에 백열광처럼 밝은 윤을 머금고 있는 모습을. 구름처럼 서로에게 달려들어 치이고, 쓸리며 부르는 쇠의 노래를. 자석이 다른 자석과 맞붙는 것만큼이나 뻔했다. 가방 틈이 벌어지면 금빛 소리들이 쏟아져야 했다.
무현이 갑자기 몸을 웅크렸다. 오른쪽 종아리로 손을 가져갔고, 불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마구 비벼댔다. 온 힘을 다해 신음이 새는 걸 참고 있었다.
"왜 그래요?" 아희가 멍하니 물었다.
"아침부터 발이 이상하게 느껴졌어요. 고통스럽진 않아요."
"다행이네요."
"그저 이 걸 참거나 막을 수가 없다는 걸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뿐인데."
그는 계속 다리를 주무르며 고갤 들었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들 뒤로 길게 이어진 장엄한 별들이 검은 하늘을 수놓았다. 덥수룩히 우거진 나뭇가지들이 탁탁 소릴 내며 흔들렸다.
"그게 뭔데요?"
무현은 그녀를 만족시킬 대답이 없다는 듯 그저 편한 미소를 보였다. 그리고 무릎을 짚고 다시 일어섰다. 다시 그의 걸음 하나에, 방울들이 한 번씩 떨리기 시작했다. 아희는 이마를 지긋이 문지르며 그의 뒷모습에 대고 말했다.
"끝까지 가방에 뭐가 들어있는지 말씀을 안 해주시네요. 좋아요. 더는 묻지 않을게요. 오늘 제 머릿속에 무슨 문제가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해요. 마주치고, 대화 나눴던 사람들도 전부 이상하고, 저 스스로는 말할 것도 없고." 그녀는 자신의 어깨에 걸쳐있던 코트를 천천히 걷었다. 발 끝만 내려다보며 홀로 속삭였다. "이건 이미 꿈이 아닌가요?"
무현은 그녀에게 코트를 받아 들고는 드넓은 광장, 그 위의 남색 하늘을 눈에 담았다. "이 드넓은 공간이 누군가의 꿈 속이라면, 저는 수치심을 자극하러 지하로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각성제가 아닐까 싶어요."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린 온화한 얼굴로 가방의 가죽 손잡이를 단단히 쥐었다.
"다행이네요. 마침내 별들이 보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