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곽재구, 《서울 세노야》
P22. 그때 처음 사랑을 알았지 – 곽재구, 《서울 세노야》(문학과지성사 문학과지성 시인선 95)
시인의 고백은
언제나
예사롭게 들리지
않습니다.
‘그때 처음 사랑을 알았지’라는 고백도요.
맞아요.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시인의 이런
고백을 듣고서야
비로소 드네요.
우리는 사랑을
해야 한다고 여기지만,
실은
사랑은
알아야 하는
것일 겁니다.
대개
사랑에 실패하는
사람들은
사랑을 제대로
못해서가 아니라,
사랑을 제대로
몰라서
실패하는 것일 테지요.
아마
그래서 시인은
우리에게
‘눈물의 척추가 드러나는 참회’를 하라고
충고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척추’라는 시어가
참
가혹합니다.
그래도
그렇게
참회하는 데
성공한다면
우리는 그제야
시인처럼
‘살아 있는 것이 온통 죄’라고
깨닫게 될까요.
어쩌면
가장 큰 죄는
사랑하지 않은 죄,
사랑하지 못한 죄
가 아니라,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 죄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경 말씀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라는 말씀이
훨씬 더
상세하고 훨씬 더
길잖아요?
뭐겠습니까.
알아야 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마침내 시인은
이렇게 잔혹한
사랑의 문장을
쓰고 맙니다.
‘사랑을 위해 절망의 뼈를 깎는 사람들의 밤은 아름답습니다’라고요.
절망, 뼈, 밤...
사랑을 위한
시인의 시어들이
가차 없습니다.
가차 없기에
마침내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겠지요.
‘어릴 적엔 사랑이 가득한 들판에서 살고 싶었습니다’라는
시인의 고백이
참 아련하게
가슴을 저밉니다.
시인도
‘어릴 적엔’
사랑을,
사랑의 가차 없음을
몰랐던 것이겠지요.
알았다면
그렇게 감히
‘살고 싶었’다고
소망하진
못했을 테니까요.
어쩌면
진정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나면
누구도 함부로
사랑 따위
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시인은
이렇게 다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양심과 사랑과 강철의 文學 세우리라.’
‘강철’이라는
강력한 시어를
동원했음에도
예, 맞아요.
아직 세우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영원히
못 세우고 말지도
모르지요.
사랑은 그야말로
가차 없는 것이니까요.
이걸 우리에게
알게 해 준
것만으로도
시인은
제 할 몫을
다, 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