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니,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P23. 거리를 걷다 문득 눈물을 쏟는 한낮이 있다 – 이제니,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문학과지성사 문학과지성 시인선 520)
아,
그렇습니다.
눈물을 모르면
인생을 모르는 거겠지요.
‘거리를 걷다 문득 눈물을 쏟는 한낮이 있다’라는
시인의 고백이
가슴을 서늘하게
적시고 듭니다.
‘눈물’은
‘거리’와도
‘한낮’과도
참
어울리지 않는 시어
아닙니까.
하지만
인생의 쓴맛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맛본 사람은
알 겁니다.
‘한낮’의 ‘거리’에서 ‘눈물’을 ‘쏟는’
누군가의 심경을요.
뒤를 잇는 시인의
고백은
삶의 참담함을
더없이 오롯하게
보여줍니다.
‘오래 오래 울고 일어나 어딘가로 휘적휘적 걸어가는 걸음이 있다’라는
고백이요.
‘오래 오래 울고 일어’났다는 것은
그 시간 동안
아무도
그 우는 이를
위로해 주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누구라도
따뜻한 말 한마디로,
또는
따뜻한 손길로
그 사람을
위로해주거나 쓰다듬어주었다면
그렇듯 ‘오래 오래’
홀로
울고 있지는 않았을
터이니까요.
예,
삶이란
그렇게
잠깐의 위로도
받지 못한 채
홀로
눈물을 닦고
다시
‘일어나’
‘어딘가로’든
‘휘적휘적 걸어가’야 할 만큼
참담한 것입니다.
시인은
그토록 참담한
삶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사람의
그토록
참담한 마음을
이렇게 규정합니다.
‘죽으려고 하면서 사는 마음’이라고요.
아무렴,
시인은 아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차선의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요.
‘누구도 아무도 어디로 가라고 일러주지 않’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을요.
동시에,
속절없이 ‘사라져가는’ 것이
‘시간의 속성’이라는 것도요.
아마 그래서
시인은
‘자주 읽고 자주 쓰고 자주 그리고 자주 내려놓’으면서
살아가나 봅니다.
그리고는
결국 이렇게
자백하고야 맙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으로 살아남는 일이 어찌하여 죽음을 무릅쓰는 일이 되어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라고요.
‘알 수 없’다는
시인의
겸손한 한마디가
참
가슴 아픕니다.
그래도 시인은
주저앉아 있지만은
않습니다.
이렇게 조언하고
있는 것을 보면요.
‘제자리걸음이어도 전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라고요.
또,
‘가장 밝은 빛 직전의 가장 어두운 빛으로 한 발 한 발 전진하고 있다’라고요.
그런 자각으로
‘시간의 속성’에 대해서도
다시 규정합니다.
‘시간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라고요.
그래서
기어이 시인은
이렇게 우리를
독려하기를
잊지 않습니다.
‘한 발 한 발 하루하루씩 살아가라’라고요.
그래요.
그래도 삶은
‘하루하루씩’ 정성껏
쌓으면서
살아야 하는 거겠지요.
그러면 우리는
마침내
‘숨소리 뒤에 들려오는 아름다움’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시인의 말대로
끝내
‘죽어가는 방식으로 피어나는 꽃’일 것입니다.
이 통찰이,
이 위로가,
이 격려가,
이 응원이
참
눈물겹게
귀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