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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Nov 02. 2024

그 이름 없는 사제는 어떻게 죽음에 이르렀는가?_18

  - 로베르 브레송,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

18. [영화 톺아보기] 그 이름 없는 사제는 어떻게 죽음에 이르렀는가? - 로베르 브레송,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1951)

#17. 다시 백작 부인

   또다시 백작의 집을 방문하는 사제.

   하지만 상대는 백작도 가정교사도 아닌 백작 부인입니다.

   하긴 샹딸의 문제를 위해서라면 당연히 누구라도 만나야 하지요. 사제의 집요함이 돋보이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비로소 저간의 사정,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차라리 논쟁이라고 해야 어울릴 만한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다소 길고 심각한 내용임에도 거기에 담긴 정서가 워낙 절박한 탓에 하나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꼼꼼히 따라가 볼 필요가 있는 중요한 대목이지요.

   마침 백작 부인은 벽난로에 불을 지피는 중입니다.

   사제가 부인에게 말합니다.

   “샹딸이 지나치게 극단적이어서 걱정입니다.”

   하지만 아들을 잃은 데 대한 상심이 너무나 커서일까요. 딸이 자살 충동에 시달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도 백작 부인은 이상하리만치 심드렁합니다.

   오히려 이렇게 되묻지요.

   “죽음이 두려우세요?”

   사제는 샹딸이 지금 힘든 상황에 처해 있다는 말로 대화의 방향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만, 백작 부인은 여전히 냉담합니다.

   “모든 게 남편 마음대로랍니다. 돈 한 푼 없는 가정교사한테는 필요 이상으로 친절하고요. 하지만 저는 관심 없어요. 오랫동안 남편이 저지르는 수많은 부정과 모욕을 참고 살았는데, 할머니가 다 된 지금에 와서 제가 뭐 하러 새삼스럽게 그 따위 문제로 고민해야 하지요?”

   전혀 짐작을 못 한 바는 아니지만, 막상 백작 부인의 완강한 태도에 부딪히자 사제는 막막합니다.

   심지어 백작 부인은 자기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느냐고 따져 묻기까지 합니다. 이는 흡사 자신을 고난에 빠트린 신의 깊은 의중을 헤아리지 못하여 원망의 소리를 내지르는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 한 가지입니다.

   하지만 사제한테는 이것이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는 고집스럽게 샹딸의 문제를 겨냥합니다.

   “어린아이를 집 밖으로 내쫓으실 작정이십니까? 자칫하다가는 샹딸마저 영영 잃으실 수도 있습니다.”

   이런 추궁에도 백작 부인은 계속 자기는 남편 뜻을 따랐을 뿐이라는 핑계로 어물쩍 넘어가려 합니다.

   딸의 문제에 이렇듯 체념에 가까우리만큼 무심하다는 것은 백작 부인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결정적으로 무너져 내렸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어쩌면 딸보다 그 어미의 구원이 더 시급한 문제인지도 모릅니다.

   사제는 경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 그뿐이신가요? 신께서 부인을 파괴하실지도 모릅니다.”

   부인은 냉소합니다.

   “이미 파괴하셨어요!”

   그러면서 아들의 사진을 돌아다보는 백작 부인.

   “내 아들을 빼앗아 가 놓고 이제 와서 또 무슨 해를 입힐 수 있다는 거죠? 난 하나도 겁 안 나요.”

   요컨대 백작 부인은 지금 금쪽같은 아들을 빼앗아 간 신한테 화가 나 있는 것입니다.

   그 분노가 너무나 커서 그녀는 아무것에도, 심지어 남편의 외도나 딸의 자살 위협에조차도 도대체가 무신경합니다. 삶의 의미 자체를 잃은 탓입니다.

   사제는 애써 그 참척(慘慽)의 슬픔으로부터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고 부인을 설득해 보지만, 통할 까닭이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병약한 사제는 벌써 지친 기색이 역력합니다. 오히려 부인 쪽에서 사제의 건강을 염려하고 나설 지경이지요.

   하지만 그래도 사제는 부인과 나누던 대화를 그만두려 하지 않고,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고 말합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차츰 종교적인 차원으로 올라섭니다.

   백작 부인이 비웃듯 내뱉습니다.

   “하기야 신은 사랑의 주인이죠.”

   “아닙니다. 신은 사랑의 주인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입니다. 부인 스스로를 사랑의 영역 밖으로 몰아내지 마십시오.”

   백작 부인은 그러는 사제를 외면하며 내뱉습니다.

   “저를 죄인 취급하시는군요.”

   “숨기신 죄악으로 공기가 더럽혀집니다.”

   이에 부인은 사제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집니다. 집요하기는 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숨긴 죄악이 뭔데요?”

   목소리에 잔뜩 날이 서 있습니다. 그 가파른 마음 자락을 어떻게든 어루만져주려는 사제의 노력은 애처롭기만 합니다.

   “이쯤에서 체념하시지요. 그리고 마음을 여십시오.”

   “도대체 뭘 체념하라는 거죠? 제가 체념하지 않은 게 뭐가 있다고요?”

   부인의 어조는 완연히 항변조입니다. 아들을 잃은 슬픔이 부인의 가슴 깊이 한으로 맺혀 있음을 우리는 헤아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인은 말을 돌립니다.

   “나, 미사에 발길을 끊을지도 몰라요.”

   이젠 사제가 애원조로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인, 주님께 이러시면 안 됩니다.”

   “걱정 마요. 그래도 난 평온하게 죽을 테니까. 신은 나한테 무관심해지셨어요. 그렇다고 내가 신을 증오한다고 생각지는 마세요.”

   이제 샹딸보다는 부인의 신앙이 문제입니다.

   자신을 불행에 빠트린 신을 원망하여 신한테서 작심하고 멀어지려는 한 딱한 영혼 앞에서 사제는 자신의 병약한 몸을 돌볼 겨를이 없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에 온 정성을 다 기울여야 합니다.

   “더는 증오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만나십시오.”

   백작 부인이 아들의 사진이 박힌 목걸이를 꺼내 들여다보는 것은 여기에서입니다.

   사제는 때를 놓치지 않습니다.

   “주님과 흥정하려 드시면 안 됩니다. 아무 조건 없이 다가가십시오. 확실한 것은 산 자의 왕국도, 죽은 자의 왕국도 없고, 오직 주님의 왕국만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도 백작 부인은 완강하기만 합니다.

   “내 아들을 데리고 가버린 신께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하시고 싶은 대로 하시라고요. 우릴 실컷 짓밟으시라고요. 이런 소리, 신부님께는 끔찍하게 들리겠죠?”

   아니라고 부정하는 사제.

   자신도 그렇게 항변할 때가 있다고 고백합니다.

   이 순간 문득 사제는 죽은 의사 델방드를 떠올립니다.

   그리고 또 독백.     

   ‘델방드 박사가 자꾸만 떠오른다. 늙고 지치고 엄격한 그의 눈길. 감히 마주 보기가 겁나는 눈이었다.’     

   마침내 돌아가려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사제.

   “부인, 주님께서 이교도나 철학자들의 신이시라면 높은 곳으로 피난을 가실 테고, 우리의 불행은 그 주님을 추락시킬 것입니다. 하지만 신께서는 바로 우리 앞에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향해서 주먹질을 할 수도 있고, 그 얼굴에 침을 뱉을 수도 있고, 주님을 채찍으로 때릴 수도 있고, 나아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우리는 이미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백작 부인은 간절한 눈빛으로 자기한테 무엇을 바라느냐고 사제한테 되묻습니다.

   사제는 답을 하는 대신 백작 부인을 기도문으로 인도합니다.

   “따라 하십시오. 당신의 왕국이 임하시고……”

   부인은 순순히 사제를 따릅니다.

   “당신의 왕국이 임하시고……”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백작 부인은 문득 고개를 푹 숙이고 맙니다.

   “못하겠네요. 아들을 두 번씩이나 잃는 것 같아요.”

   “부인께서 원하시는 왕국은 부인의 것이자, 동시에 신의 것입니다.”

   사제를 우러러보는 백작 부인.

   이윽고 사제의 기도문을 마저 따라 욉니다.

   “그렇다면, 그 왕국이 임하시기를……”

   창밖에서 이 광경을 엿보고 있던 샹딸의 모습이 슬쩍 삽입되는 것은 이 순간입니다.

   샹딸은 슬그머니 몸을 감추고, 백작 부인의 토로는 계속됩니다.

   “저는 신을 모독하고 증오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내 삶은 질서정연해 보였고, 모든 게 제자리에 있었는데……”

   “있는 그대로의 삶을 주님께 온전히 바치십시오.”

   “신부님은 이해 못 하세요. 제 자존심이……”

   사제는 부인의 말을 끊고 힘겹게 밀어붙입니다.

   “그 자존심까지도 바치세요. 몽땅 바치십시오.”

   순간 백작 부인은 충동적으로 아들 사진이 박힌 목걸이를 불 속에 던져버립니다.

   사제는 황급히 벽난로 앞으로 달려가 불 속에서 그 목걸이를 꺼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미친 짓이에요. 신은 사형집행인이 아니십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에요. 이젠 어쩔 수 없어요.”

   이 말과 함께 소파에서 바닥으로 무너지듯 내려앉는 백작 부인. 무릎을 꿇고 엎드려 오열하기 시작합니다.

   사제는 천천히 일어나 그 가련한 여인의 머리 위에 성호를 그어줍니다.

   “평화를……”

   샹딸 문제를 의논하려던 것이 엉뚱하게도 백작 부인의 구원을 위한 기나긴 대화의 자리가 되어버린 형국입니다.

   결국 모든 사태의 기원에 있는 것은 백작 부인의 아들이 당한 불의의 죽음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졌습니다.

   그 사건이 백작 부인의 체념, 또는 배교와 백작의 외도, 그리고 어머니의 무관심을 겪고 아버지의 외도를 목격한 딸의 자살충동을 조장한 셈입니다.

   물론 영화는 그 아들이 죽은 경위를 소상히 밝혀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죽음이 이미 있을 뿐이지요.

   아마도 그 죽음이 전쟁과 관련이 있지 않겠나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보는 이로서 할 수 있는 추측의 하나일 뿐입니다.

   문제는 신부의 이 애처로운 노력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느냐 하는 점입니다.

   과연 백작 부인은 사제와 나눈 대화에서 구원의 희망을 얻었을까요.  *(다음 글로 잇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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