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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Nov 01. 2024

그 이름 없는 사제는 어떻게 죽음에 이르렀는가?_17

  - 로베르 브레송,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

17. [영화 톺아보기] 그 이름 없는 사제는 어떻게 죽음에 이르렀는가? - 로베르 브레송,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1951)

#16. 백작의 딸 샹딸

   이어 카메라는 나이답지 않게 수심에 찬 소녀 샹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윽고 걷기 시작하는 샹딸을 따라 카메라가 천천히 이동하면 샹딸보다 훨씬 더 짙은 그늘이 드리워진 사제의 얼굴이 화면 속으로 들어옵니다.

   이 장면의 처음에서부터 이미 둘은 같은 공간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샹딸이 느닷없이 사제한테 따지듯 묻습니다.

   “약속 지키시겠지요?”

   약속? 무슨 약속일까요?

   영화는 계속 이런 식입니다.

   아무런 설명도 없었지만, 아직은 우리가 내용을 모르는 어떤 ‘약속’이 앞서 이미 있었던 것입니다.

   사제는 마지못한 기색으로 대답합니다.

   “꼭 지켜요, 약속은.”

   답을 듣자마자 그곳을 떠나는 샹딸과 돌아가는 샹딸의 모습을 창을 통하여 물끄러미 내다보는 사제.

   관객으로서는 그것이 무슨 약속인지 알 수도 없는 상황인데, 우선 사제의 독백부터 흐릅니다.


   ‘난처했다. 존재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젊은 사제는 오만가지 근심에 시달리는 낯빛으로 외투와 모자를 집어 들고 밖으로 나서서 또르씨 사제를 찾아갑니다. 마을에서 그가 뭔가 의논할 만한 상대는 역시 또르씨 사제뿐입니다.

   하지만 막상 갔더니, 찾는 사람은 부재중입니다.

   또르씨 사제는 열흘 뒤에나 돌아올 것이라는 하녀의 전언에 젊은 사제는 망연자실하여 문간 벽에 등을 기댑니다. 그리고 독백.


   ‘실망감이 너무나 커서 벽에 의지해야만 했다.


   이제 사제는 정처를 못 구한 방랑자 한 가지입니다.

   다시 샹딸의 등장.

   이번에는 성당입니다. 긴 대화의 시작이지요.

   먼저 사제가 샹딸한테 말을 건넵니다.

   “자꾸 찾아오면 곤란하다는 거, 잘 알 텐데요?”

   “약속하신 날이 바로 오늘 아니에요? 내일이면 이미 늦다고요. 제가 여기 온 걸 그녀도 잘 알아요.”

   놀라는 눈빛의 사제. 거기다 대고 샹딸이 다시 말합니다.

   “그 여자, 모르는 게 없거든요. 아주 교활한 여자예요. 제가 좀 더 주의했어야 하는데……. 그래도 뭐, 그녀의 시선에는 이제 익숙해졌어요. 아, 다들 그녀가 착한 줄 알고 있다니까요. 그 두 눈깔을 뽑아 씹어먹었으면 좋겠어요. 짓뭉개버리고 싶어요.”

   증오로 치를 떠는 표정의 샹딸. 목소리에 사나운 독기가 서려 있습니다.

   사제는 그러는 샹딸을 어떻게든 달래 보려 합니다.

   “신이 두렵지 않아요?”

   하지만 이런 말도 역부족입니다. 샹딸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얘기만 합니다.

   “그녀를 확 죽여버릴까 봐요. 아니면 제가 자살해 버리든가요.”

   샹딸은 지금, 아내가 멀쩡히 살아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남편을 유혹한 한 여자를 증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여자가 유혹한 남자는 다름 아닌 샹딸의 아버지고요.

   그 나이의 소녀가 감당해 내기에는 힘겨운 현실이요 감정입니다.

   “여기서는 그런 말, 곤란해요.”

   하지만 그래봐야 기껏 사제는 샹딸을 고해실로 인도할 수 있을 뿐입니다.

   샹딸은 계속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못합니다.

   “고해 따위 정말 싫어요. 전 정의를 바랄 뿐이라고요.”

   이 순간 사제는 너무나 무기력하고 무능력합니다. 견디기 힘든 정신적, 심리적 고통에 빠진 소녀를 위해서 사제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심지어 사제는 기도조차 못 해줍니다.

   그런 사제한테 샹딸이 다시 말합니다.

   “그 여자가 나타난 뒤로 저는……”

   순간 사제가 얼른 썅딸의 말은 가로막고 나섭니다.

   “진정해요.”

   샹딸은 이제 짜증이 납니다.

   “알았어요. 신부님도 진정하세요. 어젯밤, 저는 그들의 말소리를 들었어요. 제가 창문 바로 아래 있었는데, 그들은 커튼도 치지 않았어요. 모르긴 몰라도, 그들은 무슨 수를 쓰든 저를 기어코 쫓아내고야 말겠지요. 안 그래도 저는 다음 주 화요일에는 여기를 떠나야 해요. 엄마는 제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세상에, 그래야 한다니! 웃기는 일 아니에요? 엄마는 그들이 하는 말이라면 뭐든지 다 믿는다니까요. 개구리가 파리를 한입에 꿀꺽 삼키는 것처럼요.”

   “어머니 이야기는 하지 말아요. 엄마를 사랑하지도 않잖아요?”

   샹딸은 엄마를 향한 저주의 말을 늘어놓습니다. 반항기 가득한 어조요 태도입니다.

   “어디 한번 계속해 보시지요. 저는 엄마를 증오한다고요. 엄마는 한마디로 등신 같고, 비열하고, 자기 행복조차도 지킬 줄 모르는 여자예요.”

   그러는 샹딸을 간절하면서도 망연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사제. 샹딸의 증오가 애정의 다른 표현임을 모르지 않는 것입니다.

   샹딸은 어느덧 울상이 되어 있습니다.

   “왜 그런 눈으로 저를 보세요? 그냥 내버려 두세요.”

   그래도 사제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제한테도 집요한 구석이 있습니다.

   “아버지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이렇게까지 반항적이지는 않을 텐데…….”

   “더는 존경하지 않아요. 어쩌면 모두를 증오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마침내 샹딸은 견딜 수 없다는 듯 내뱉고 맙니다.

   “복수할 거예요. 제 몸을 망가뜨리고, 이 모든 일이 아빠 때문이라고 편지에 쓸 테예요.”

   샹딸은 거기서 말을 멈추고, 사제의 독백이 나머지를 채웁니다.


   ‘나는 그녀가 못다 한 말이 무엇인지 헤아릴 수 있었다.


   사제는 필사적으로 샹딸을 설득합니다.

   “그렇게 할 수 없을 거예요. 설사 정말로 그렇게 하려던 건 아니잖아요? 편지, 나한테 줘요. 주머니 안에 있는 그 편지요.”

   뜨끔한 표정의 샹딸.

   그 표정을 보는 사제의 독백이 이어집니다.     

   ‘급한 마음에 되는대로 던져본 소린데, 맞은 모양이었다.’     

   사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그칩니다.

   “어서 이리 내요.”

   체념한 듯 순순히 편지를 꺼내 사제한테 건네는 샹딸.

   그리고 돌아가려다 멈추고는 사제를 외면한 채 한마디 비수 같은 말을 던집니다.

   “신부님은 악마예요!”

   그리고 잠깐의 힐끗거림.

   혼자 남은 사제는 샹딸한테서 받은 편지를 읽지도 않은 채 그대로 불살라버립니다.

   그리고 또 독백입니다.


   ‘샹딸의 슬픔은 내 능력으로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문제였다. 그녀의 두 눈에서 나는 분명한 자살의 징후를 읽었다. 하지만 그 자살 충동은 폭력성이 밑바닥에 깔린 것으로, 무분별한 충동이었다.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나는 그저 보잘것없는 한 사람의 사제일 뿐이었다. 처음부터 샹딸 양과는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이게 다 주께서 나한테 내리신 벌이다. 이젠 돌이킬 수 없다. 끝까지 가야 한다.


   다시 창밖의 어둠을 멍하니 내다보는 사제.  *(다음 글로 잇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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