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베르 브레송,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
22. [영화 톺아보기] 그 이름 없는 사제는 어떻게 죽음에 이르렀는가? - 로베르 브레송,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1951)
#21. 고통받는 영혼의 시간
우리 한국 영화에서 종교(특히 기독교) 문제로 고뇌하는 인물이 등장하는 사례를 꼽는다면 유현목 감독의 작품들이 발군이지요. 김은국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순교자〉(1965)가 그렇고, 이문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사람의 아들〉(1980)이 그렇습니다.
여기에 이청준의 동명 소설이 원작인 이장호 감독의 〈낮은 데로 임하소서〉(1981) 정도를 추가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요컨대, 전체적으로 따지면 그런 사례는 드물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동시에 영화 속에 표현된 종교적 고뇌의 양상이 어느 만큼 가열한가를 기준으로 따졌을 때 기독교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서양에서 나온 영화들에 견줄 바가 못 되는 것 또한 어쩌면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는 김성동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1981)에 비견될 만한 불교 영화가 서양에서 나올 리가 만무한 것과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로베르 브레송 감독의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는 기독교적인 고뇌를 다룬 영화들 가운데서도 명실상부한 정점에 놓이는 작품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더 바르게 말하자면, ‘정점에 놓인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까지 합니다.
그 압도적인 고뇌의 현장이 바야흐로 펼쳐집니다.
화면에는 어느덧 병색이 완연해진 사제의 애처로운 모습이 보입니다.
바로 그 앞 장면에서 보았던 사제의 모습에 대면 혈색의 낙차가 워낙 커서 얼른 그 상황이 실감으로 와닿지 않을 정도입니다.
복통과 현기증으로 당장이라도 몸져누워야 할 환자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사제는 그런 위태로운 상태의 몸을 이끌고 허위단심 길을 나섭니다.
헐벗은 나무들이 검은 실루엣으로 과장되게 드러나 보이는 숲길에서 배경에 깔리는 불길한 정조의 음악이 고조되는가 싶은 찰나, 사제는 기어이 쓰러지고 맙니다.
일어나려 애를 써보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사제는 독백합니다.
‘차디찬 진흙이 내 볼에 달라붙는 듯했다. 이대로 의식을 잃어버리면 누군가에게 다 죽어가는 몰골로 발견될 테지. 그럼 보나 마나 또 사람들 입길에 오르내리는 신세가 되고 말 거야.’
사제는 두 팔로 상체를 밀어 올리며 안간힘을 다해 일어나려 애씁니다.
‘또르씨 사제한테서 들었던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가 자꾸만 눈앞에 떠올라 아른거렸다.’
어쩌면 이 순간 사제는 의식이 몽롱해지면서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고통이 너무너무 지독해서 나도 모르게 성모 마리아의 한쪽 손을 덥석 붙잡고 말았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사제는 지향 없이 허공을 응시하며 몽유병자처럼 어디론가 비틀비틀 걷기 시작합니다.
어찌 보면 그는 자기 앞에 환영으로 나타난 성모 마리아의 인도를 받는 듯도 합니다.
이 모습을 카메라는 비스듬히 트래킹으로 따라잡습니다.
하지만 지금 자기가 잡고 있는 손이 성모 마리아의 손이 아님을 사제는 이내 알아차립니다.
‘빨래를 하느라고 거칠어진 어린아이의 손이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사제는 무슨 연유인지 그 얼굴을 보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결국 사제는 ‘그 얼굴을 보았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페이드 아웃.
드디어 사제가 의식을 잃은 것입니다.
그 위로 흐르는 사제의 독백.
‘그것은 생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아이의 얼굴이었다.’
다시 화면이 밝아지면 사제는 한데의 바닥에 누워 있고, 머리맡에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등불이 시들시들 허약한 빛을 흩뿌리며 놓여 있습니다.
앞서 사제가 가방을 그 집까지 직접 전해주러 갔던 예의 소녀 세라피타가 대야에 물을 담아서 들고 나타나는 것은 다음 순간입니다.
그러니까 그 ‘생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얼굴의 아이가 사제를 구한 것입니다. *(다음 글로 잇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