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베르 브레송,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
27. [영화 톺아보기] 그 이름 없는 사제는 어떻게 죽음에 이르렀는가? - 로베르 브레송,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1951)
#26. 위암
하지만 다음 장면은 사제가 출발하는 장면이 아니라 도착하는 장면이고, 그다음 장면은 또 사제가 의사를 찾아가는 장면이 아니라, 이미 진료를 받고 병원을 나서는 장면입니다.
아무런 설명도 없지만, 사제의 축 늘어진 어깨와 거지반 넋을 잃은 표정은 진료 결과의 어떠함을 짐작케 하는 데 조금도 모자라지 않습니다.
이 순간 사제가 얼마나 깊이 절망하고 있는가를 영화는 역(驛)으로 돌아가던 도중 어느 이름 모를 성당을 찾아 들어간 사제의 모습을 통하여 알려줍니다.
이어지는 사제의 독백은 너무나 느닷없고 충격적입니다.
‘기도를 거부하는 육체의 반항이 이토록 극심한 적은 없었다. 내 의지만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결국 사제는 기도를 못 한 채 성당을 그냥 나서고 맙니다.
사제는 어느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시켜 마시며 펜을 들고 또 일기를 씁니다.
여기서 비로소 우리는 사제가 앓고 있는 병의 정확한 이름을 그 자신의 목소리로 처음 듣게 됩니다.
‘위암―. 이 말이 나를 놀랬다. 나는 내심 다른 병명을 기대하고 있었다. 결핵인 줄로만 알았는데, 풀기 어려운 문제와 맞닥뜨렸을 때처럼 이맛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극심한 고통 끝에 오는 죽음이라니! 받아들이기가 정말 힘들었다.’
물론 앞서 사제가 복통에 시달리는 모습이 이미 나오기는 했지요.
그래도 위암이라니요? 얼마나 낯설고 충격적인 병명입니까.
어쩐지 결핵이 아니면 폐렴쯤이어야 할 것 같았는데 말입니다.
우리 근대 문학사를 포함한 세계 문학사에서 시인과 소설가들의 적지 않은 수가 폐렴이나 결핵으로 세상을 뜬 사례를 떠올려 보면, 지금 이 사제와 같은 선병질적인 이미지의 인물한테 위암이라는 병명은 미학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느낌입니다.
어쩌면 바로 이 점이 이 사제의 절망스러운 상황을 더욱 구차스럽게 심화시키는 원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제는 이 순간 자신의 병명 자체부터가 싫은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삶이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데, 자신이 앓고 있는 병명조차도 본인의 기대를 배반하는 것이라면 도대체 그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이와 관련해서라면 멀리 갈 것도 없지요.
일본의 주지파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의 한 사람인 아베 도모지(阿部知二, 1903~1973)가 1936년에 발표한 소설 《겨울집(冬の宿)》(이원희 옮김, 소화)에는 심지어 이런 대목까지 나옵니다.
‘일본에는 지금 백이삼십만 명의 폐병 환자가 있고, 일 년에 이삼십만 명이 죽어. 이건 의사의 진단서에 확실히 쓰여 있는 경우에 한한 거지. 실제로는 그 배나 되는 환자가 있을지도 몰라. 15세부터 30세까지의 젊은이들의 사망의 절반 이상은 이 병 때문이야. 소학교 선생은 매년 오백 명씩이나 이 병으로 죽어가고 있어. 그런데도 그에 대한 일본의 치료 시설 등은 진짜 화가 날 정도로 빈약해. 그런 점에서 일본은 절대적으로 삼류나 사류 국이야.’
이것이 병과 관련하여 당시 사람들이 공통으로 처해 있었던 실존의 상황이었습니다.
요컨대 사제는 현실과 동떨어진 육체의 병을 앓고 있는 셈이고, 따라서 이것은 어쩌면 그가 자기 교구민들의 삶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을 상징적으로 암시하는 장치인지도 모릅니다.
병명이야 무엇이 되었든, 그래도 사제가 선택하는 것은 ‘여전히’ 글쓰기입니다.
삶의 고통을 견딜 수 있는 방법은 끊임없이 쓰는 일뿐이라는 듯, 글쓰기에 몰두하는 사제한테서는 결연한 의지마저 느껴집니다.
그러니 어쩌면 이 영화의 진정한 주제는 아닌 게 아니라 ‘글쓰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것도 사제를 구원할 수 없을 듯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오로지 글쓰기만이 그를 지탱하여 준다는 기이한 아이러니―.
사제는 오로지 쓰기 위하여 남은 생명을 안간힘을 다해 유지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사제는 힘겹게 머릿속으로 그려봅니다.
‘마지막 아침들, 닭 울음소리, 고요한 창문…….’
그 ‘순수하고 신선한’ 이미지들을 이상한 열정으로 한사코 떠올리려 애쓰는 사제의 모습은 슬프다 못해 비장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결핵이든 폐렴이든 위암이든, 결국 사제는 사형선고를 공식적으로 받은 셈입니다.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자각은 어쨌든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사제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 맡은 바 임무를 계속한다는 것의 의미, 또는 무의미함을 놓고 사제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제는 앙브리꾸르로 돌아가지 않고, 옛 친구를 찾습니다.
이 대목은 너무도 도스토예프스키스러운 상황이어서 원작자인 조르쥬 베르나노스를 잠시 잊게 할 정도입니다. *(다음 글로 잇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