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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Nov 20. 2024

P26. 축복의 말, 은혜의 말

  - 최승자, 《쓸쓸해서 머나먼》

P26. 축복의 말, 은혜의 말 – 최승자, 《쓸쓸해서 머나먼》(문학과지성사, 문학과지성 시인선 372)


   시인은 고백합니다.

   ‘오랫동안 아팠다’라고요.

   그리고 덧붙이지요.

   ‘이제 비로소 깨어나는 기분이다’라고요.

   아,

   정말

   그렇지 않을까요.

   아파보지

   않은 사람이,

   그것도

   오래도록

   아파보지 않은

   사람이

   ‘비로소 깨어나는 기분’을

   알 수 있을까요.

   이 아픈

   고백에

   공감할 수 있을까요.

   잠깐이 아니라,

   ‘오랫동안

   아파본 사람은

   ‘오랫동안 아팠다’라는 한마디를

   듣는 순간

   바로

   가슴이 서늘해질

   것입니다.

   통증 같기도 하고,

   슬픔 같기도 하고,

   억울함 같기도 하고,

   심지어

   향수 같기도 한

   이 서늘함을

   저는

   잘 압니다.

   그래서 이 한마디로

   이 시인은

   제 마음속에

   훅

   하고 깊이

   들어와

   버렸습니다.

   그렇게 아파본

   시인이기에

   ‘어디선가 한 세상 너머에서 바람이 스쳐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겠지요.

   또,

   그런 사람이기에

   ‘황홀합니다’라고도

   고백할 수 있는

   거겠지요.

   어째서냐고요?

   지금 시인은

   ‘시집을 쓰고’ 있거든요.

   지금 시인은

   ‘내가 시집을 쓰고 있다는 꿈을 꾸고 있는 중’이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털어놓잖아요?

   ‘내가 시집을 쓰고 있다는 꿈을 꾸고 있는 중입니다’라고요.

   하지만

   잘 들어야 합니다.

   시인은 지금

   ‘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은 지금

   ‘쓰고 있다는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시’가 아니라,

   ‘시집’을요.

   그러니까 시인은 아직

   넉넉히

   회복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비로소 깨어나는 기분’만으로도

   시인은

   넉넉히

   ‘황홀’하다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랫동안’ 아파본 사람은

   압니다.

   아팠다가 깨어나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를요.

   그건

   정말로

   ‘황홀한’ 것입니다.

   위로가 아닌,

   그저 고백인데도

   제가

   위로를 받는 것은

   ‘잘 알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시인은

   위로를 넘어

   축복의 말을

   해주네요.

   ‘미래의 시간들은 銀가루처럼 쏟아져 내린다’라고요.

   길고 긴 아픔의

   시간에서

   놓여난 사람에게

   시인이 건네주는

   은혜의 말입니다.

   얼마나 귀한지

   모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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