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정수 May 06. 2024

3. p.s. : i love you

  - 모리 마사유키, 《추신》

3. p.s. : i love you / 《추신》 - 모리 마사유키 지음, 이선희 옮김, 바움

더는 편지를 쓰지 않는 세상?

   《추신》은 만화책입니다. 만화책에 붙인 제목치고는 참 고풍스럽지요?

   ‘추신(追伸)’이란 물론 우리가 편지를 쓸 때 맨 끝에다가, 문득 잊어버린 사항이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덧붙이곤 하는, 그러나 정작은 가장 중요한 내용이기 십상인 ‘p.s.’, 바로 그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얀 종이 위에 까만 펜으로 밤새워 손수 누군가에게 보낼 편지글을 간절한 마음으로 꾹꾹 눌러 써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추신에 얽힌 추억이 한둘쯤 있을 것입니다. 더러는 본문보다 더 많이 마음을 기울여 쓰게 되는 내용이기도 하지요. 《추신》은 바로 이 추신의 매혹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김민기의 노래 〈가을편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과연 앞으로 백 년 후에도 사람들은 이 가사의 의미를 곧이곧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아니, 이 가사가 담고 있는 정서의 깊이를 그대로 느낄 수 있을까요?

   글쎄요, 제가 그 시대까지 살아남는다면 확인해볼 수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저 편지 자체가 과연 그 시대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부터가 의심스럽습니다.

   어쩌면 아무도 편지 따위 쓰지 않는 세상이 되어 있지나 않을까요? 타임머신을 타고, 아니면 어찌어찌 순간이동을 하여 그 시대로 날아가 아이들한테 “너희들 편지 써봤니?” 하고 물으면 자칫 거꾸로 “편지가 뭐예요?” 하는 질문을 받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편지의 운명

   그래서 얼마간 연배가 있으신 독자분이라면 누구나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이렇게 문득 스스로 물어보게 되지 않을까요?

   ‘내가 마지막으로 편지를 쓴 것은 언제였지?’

   물론 충분한 시간을 들여 기억의 갈피를 알뜰하게 뒤적여 보면 도저히 알아낼 수 없는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자못 까마득하게 느껴져서 아무래도 선뜻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은 아닐까요? 저처럼요.

   그만큼 세월이 많이 지났고, 세상이 많이 변했다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앞으로는 더더욱 변할 것입니다. 정말 이것이 피치 못할 편지의 운명일까요? 또는, 운명이어야 할까요?

   그렇다고 이메일이나 카톡, 문자 메시지 따위를 편지라는 이름으로 부르거나, 편지의 범주에 넣고 싶지는 않습니다. 아무렴, 편지한테도 자존심이 있을 텐데, 그럴 수야 없지요.

   따라서 어쩌면 컴퓨터와 핸드폰의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편지를 써서 주고받는 경험을 아마 영원히 못 해본 채로 인생의 마지막 문을 닫고 눈을 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덕분에 사랑하는 사람과 연락할 방도가 편지와 붙박이 유선전화 밖에는 없던 시절의 그 조마조마하고 애틋한 감정을 지금 이후의 세대는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아니, 이해는 고사하고, 답답하거나 고리타분하게 느껴서 지레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도 있겠습니다.

   무엇보다도 편지란 우선 오고 가는 데 ‘시간’이 걸리거든요. 그렇다고 제가 그것을 꼭 불행한 일이라고 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좀 서글픈 느낌이 드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편지의 정서와 감각

   이 만화책이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된 것은 2007년 12월입니다. 일본에서는 2004년에 나왔습니다. 하지만 2000년대가 이 만화 속 이야기의 시대 배경은 아닙니다. 또 이 만화가 실제로 그려진 때도 2000년대가 아닙니다.

   이 만화는 1957년생인 일본의 만화가 모리 마사유키가 그의 나이 30대 초반인 1988년에서 1989년까지 어떤 잡지에 연재한 것입니다. 만화 속 이야기의 시대 배경도 1988년에서 1989년 사이입니다. 그러니까 이 만화는 연재가 끝나고 15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야 책으로 묶여 나왔고, 그러고서도 3년이나 더 지난 다음 비로소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된 것입니다.

   이렇듯 책의 배경을 꽤나 상세하게 밝혀두는 것은 편지가 아직은 ‘주요한’ 연락 수단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그 시대의 정서가 이 만화 속에 ‘등신대로’ 살아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곧, 《추신》은 21세기에서 지난 세기인 20세기의 정서를 회상하며, 혹은 상상하며 그린 만화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편지라는 매체를 둘러싼 여러 가지 현실적인 정서와 감각이 여기에서는 오롯하게 살아 있다는 것이지요.     


우연한, 또는 운명적인 첫 만남

   여기 저자와 비슷한 연배의 두 남녀가 있습니다. 남자 이름은 야마다 겐조, 여자 이름은 고바야시 아키코입니다.

   남자는 도쿄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고향인 홋카이도로 내려와(위도상으로는 올라간다고 해야 맞겠지만, 왠지 우리 감각으로는 내려간다고 표현해야 맛이 나네요) 평소 하고 싶었던 판화 만드는 일을 하며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자는 대학을 그만두고 도쿄에 있는 남자의 친구네 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나중에 책의 매력에 푹 빠져 서점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둘 다 넉넉하지는 않아도 스스로 생계를 해결해 가며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사는, 술도 조금, 담배도 조금 할 줄 아는, 한 마디로 지극히 평범한 젊은이들입니다.

   어느 날, 우연히 여자가 남자가 사는 곳인 홋카이도로 휴가 여행을 옵니다. 남자의 친구가 한번 가보라고 여자에게 소개를 해준 것입니다. 어쩌면 여자가 홋카이도에 간다고 하니, 마침 그곳에 살고 있는 자기 친구에게 별 뜻 없이 안내를 부탁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혼자 길을 나선 여자 쪽에서는 처음 가보는 여행지니까 한 다리 걸쳐서라도 아는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좋지 않겠습니까. 한 마디로 흔히 있을 법한 휴가 여행이요, 흔히 있을 법한 만남인 것입니다.

   어쨌든 이리하여 둘은 운명적인 첫 대면을 합니다.

   만나보니, 둘은 나이도 비슷하고, 생김새도 비슷하고, 옷 입는 스타일도 비슷하고, 성격도 비슷하고, 사는 형편도 비슷합니다. 물론 생각도 비슷하고요. 이쯤 되면 무슨 특별한 사연이나 사건이 없어도 서로에게 호감을 느낄 만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이 본격적인 연애의 단계로 발전하는 것은 여자가 여행을 마치고 다시 도쿄로 돌아가고 난 뒤의 일입니다. 바야흐로 둘은 서로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합니다.     


추신의 속마음

   첫 번째 편지는 여자가 남자에게 보낸 것입니다. 여행안내를 해준 데 대한 감사의 표시지요. 문제는 추신입니다. 여자는 이렇게 씁니다.

   ‘부끄럽지만 아직 금연에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조금 여유를 가지고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결국 이것이 핵심입니다. 겉으로 내세운 소재는 금연이지만, 만남이 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여자의 심정이 조심스럽게 드러나 있지 않습니까. 추신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에 대한 남자의 첫 번째 답장도 본문보다는 추신이 더 의미심장합니다. 남자는 이렇게 씁니다.

   ‘유감스럽지만 저도 아직 금연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또 함께 뛰면서, 체력의 한계를 느껴야 할까요?’

   역시 소재는 금연이지만, 남자 또한 둘의 만남이 계속되기를 희망하고 있음을 우리는 넉넉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연인즉 이렇습니다.

   첫 만남에서 두 사람은 홋카이도의 넓은 들판을 거닐다 문득 불어온 세찬 바람에 여자의 모자가 날려가자, 그것을 주으려고 같이 한참을 뛰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숨이 차서 헉헉거리다가 금연해야겠다는 말을 주고받았던 것입니다.

   이제 두 사람은 편지를 계속 주고받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자꾸자꾸 쓰고 싶어지니까요. 그들의 마음속에서 무엇인가가 확실히 시작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습니다. 연애가 시작된 것입니다. 만화는 8할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물론 이따금 장거리전화로 서로의 목소리를 듣기도 하고, 참기 힘들면 직접 상대방이 사는 곳으로 찾아가 그리던 얼굴을 보고 오기도 하지만, 편지야말로 그들 사이의 가장 주요한 연락 수단입니다. 이 고전적인 연락의 방식, 연애의 방식이 못내 보는 이의 심금을 울립니다.     


시간과 기다림

   《추신》은 이렇듯 편지라는 수단에 얽힌, 또는 편지라는 수단이 야기하는 있을 법한 다양한 상황들을 차근차근 펼쳐 보여줍니다.

   기다림, 조바심, 그리움, 눈물, 질투, 다툼, 근심, 걱정, 의심,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

   여기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역시 ‘시간’의 문제입니다.

   편지라는 수단은 무엇보다도 우선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립니다. 이메일이나 핸드폰으로 문자를 주고받는 세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참아낼 수도 없는 길고 긴 기다림의 시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연애 감정의 순도를 따지면 어떨까요? 결국은 똑같지 않겠느냐고 항변하는 사람들도 혹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왠지 이 기다림이 연애 감정의 순도를 높인다는 쪽에 표를 주고 싶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참 순도 높은 연애를 합니다. 그러기에 합당한 성정의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편지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그들의 사랑이 조금씩 깊어져 가는 과정을 보는(만화니까 ‘보는’ 것이 맞습니다) 감흥은 참 유별난 것입니다.

   글쎄요. 21세기도 어지간히 무르익었다고 할 수 있는 지금과 같은 시기에 이런 연애 이야기를 우리는 어디에서 또 볼 수 있을까요.

   이런저런 사연들로 기껏 편지지를 채워놓고는 쑥스러운 듯 추신으로 본심을 슬쩍 드러내 보이는 두 사람의 마음은 확실히 20세기의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그립습니다.     


소리 없는 대화

   이제 이 두 사람 사이에 편지라는 소리 없는 대화가 줄줄이 이어집니다.

   여자가 말합니다.

   ‘그렇게 좋은 집은 아니지만 나중에 놀러 오세요. 컵을 두 개 준비해 놓았으니까요.’

   남자가 답합니다.

   ‘나중에 맛있는 술을 가져가겠습니다. 그때까지 컵이 깨지지 않기를 바라며……’

   남자가 또 말합니다.

   ‘전 음식은 전혀 가리지 않습니다! 위장도 매우 튼튼합니다! 10월에 당신을 만나러 가겠습니다!’

   여자가 답합니다.

   ‘많은 얘기를 할 수 없다고 해도, 야마다 씨 얼굴만 본다고 해도 가슴은 계속 두근거릴 거예요.’

   홋카이도로 남자를 만나러 가서 그만 감기에 걸리는 바람에 남자 집 방바닥에 누워만 있었던 여자가 도쿄로 돌아와 남자에게 쓴 편지의 추신은 이렇습니다.

   ‘다음엔 우리 집에서 감기에 걸리세요!’

   편지지 하나 가득 ‘쓸데없는’ 사연들을 잔뜩 늘어놓은 다음 남자는 추신에 가서야 멋쩍은 듯 간신히 이렇게 속마음을 털어놓습니다.

   ‘만약 여름에 휴가를 받을 수 있으면, 이쪽에 놀러 오지 않겠어요? 비행기 표는 내가 준비할게요. 직접 만나서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이렇듯 이 책에 나오는 추신들만 따로 모아 읽어도 두 사람의 본심이 어떤 궤적으로 섬세하게 움직이는지 훤히 알 수 있습니다. 참 매혹적이지 않습니까. 저만 그런가요?     


   p.s. : 글쎄요, 앞으로 제가 추신이라는 것을 덧붙인 편지를 다시 쓸 기회가 있을까요? 이메일이나 카톡이나 문자 메시지 따위는 앞으로도 숱하게 보내며 살 테지만, 과연 펜을 꼭 쥐고 정성껏 추신이 딸린 편지를 쓸 일이 있을지는, 아니, 얼마나 생길지는, 음, 모르겠네요. 미래에는 정말 편지가, 또는 추신이 완전히 사라질까요? 가만히 근심해봅니다.  *

이전 02화 2. 작은 소녀, 커다란 발로 씩씩하게 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