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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Dec 16. 2024

C07. 가족, 내 아버지의 모든 것

  - 이정철, 〈가족〉

C07. 가족, 내 아버지의 모든 것 – 이정철, 〈가족〉(2004)

아버지를 증오하는 딸

   딸(수애)은 아버지(주현)를 증오합니다.

   딸이 기억하는, 또는 알고 있는 아버지는 갈 데 없는 술주정뱅이로, 아내 폭행하기를 일삼은 천하의 불한당에, 처치 곤란한 성격파탄자입니다.

   전직은 경찰이지만, 한쪽 눈을 다쳐 그만둔 뒤 이제는 시장통에서 볼품없는 생선가게나 하며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그야말로 희망도 포부도 없는 구제 불능의 무능력자입니다.

   늦둥이인 어린 동생을 놔두고 엄마가 일찍 세상을 뜬 원인도 아버지의 탓이 8할이라는 것이 딸의 생각입니다.

   마땅히, 그 아버지에 대한 딸의 증오는 살벌합니다.

   하니, 그런 증오로 똘똘 뭉쳐진 딸한테 ‘바르게’ 성장하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어쩌면 어불성설인지도 모릅니다.

   딸은 끝 모를 반항의 좌충우돌 끝에 당연히(!) 범죄자의 길로 들어서고 맙니다.


철천지원수, 그 기구한 초상

   그러나 아무리 천륜으로 맺어진 부녀지간이라 하더라도, 이쪽의 증오가 질기도록 오래가면 그 반작용으로 끝내 저쪽의 증오를 부르고야 마는 법일까요.

   스스로 못된 인생을 살았음을 인정함에도 아버지는 속절없이 딸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정을 거두어들이고 맙니다.

   아니, 그러는 듯합니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3년간의 복역을 끝내고 보호관찰 처분을 받아 출소해 온 딸이 이제부터는 나쁜 일에서 손을 떼고 살겠다며 개과천선의 고백을 하는데도 아버지는 그 딸을 받아주기는커녕 되레 집에서 언제 나갈 거냐고 반문하는 것으로 내치겠다는 의지를 단호히 표명합니다.

   물론 딸은 냉큼 자기가 이렇게 된 것도 결국은 다 아버지 탓이라며 서슬이 시퍼렇게 반발합니다.

   오랜만의 재회니,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 바람을 일으켜도 시원치 않을 터인데, 정말 이상하기 짝이 없는 정경입니다.

   요컨대, 이 부녀는 지금, 아직도, 서로에게 철천지원수인 것입니다.

   딸이 이 집에서, 아니, 세상에서 유일하게 정을 붙이고 있는 대상은 오직 어린 남동생뿐입니다.

   이는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이 영화가 보여주는 한 가족의 기구한 초상(肖像)입니다.


파멸할 수 없는 가족

   하면, 우리는 이들을 정말 더는 정상참작의 여지조차 없는 끝장난 가족으로 치부하고 덩달아 마음 문을 닫아걸어야 옳은 걸까요.

   기실, 가족이라는 것이 그렇듯 쉽사리 처분해도 될 만큼 호락호락한 것이 아님은 가족 중심주의가 세상 어디에서보다도 맹위를 떨치는 나라 대한민국에서 각기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우리 스스로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 이 딱한 가족을 조금 더 공정한 눈으로 살펴보아야 할 필요성이 생깁니다.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서로를 사갈시(蛇蝎視)하는 문제의 부녀가 함께 드러내어 놓고 한없는 애정을 쏟아붓는 대상이 바로 그 어린 아들, 그 어린 남동생 정환(박지빈)이라는 사실입니다.

   삶의 모든 희망을 다 잃어버린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에 대한 가파른 증오심으로 인생의 밑바닥을 향해 거침없이 자기 파멸의 길을 내닫는 딸, 그리고 어린 아들 또는 동생―.

   집에 불이라도 지르거나 함께 쥐약이라도 먹고 동반자살이라도 해야 할 것만 같은 고약한 부녀가 그래도 끝끝내 최후의 파탄을 유보하고 있는 것은 그 어린 정환에 대한 애정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정환은 이 가족의 겉모양이나마 가까스로 유지하여 주고 있는 단 하나의 끈인 셈입니다.

   동시에 이는 우리에게 이 가족이 결정적인 파멸의 국면으로 접어들지는 않으리라는 한 가닥의 가냘픈 희망이나마 품을 수 있도록 하는 단 하나의 근거이기도 합니다.

   이야기 구조만으로 따지면 영화는 처음부터 그런 희망 섞인 결말에 대한 암시와도 같은 장치를 분명히 마련해 둔 채로 시작한 셈입니다.

   한 마디로, 이 가족은 파멸할 수 없습니다.


수렁에 빠지려는 내 딸

   그렇다면 이야기는 뻔하지 않은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속단은 금물입니다. 조금 더 기다려야 합니다.

   언제나 그렇듯, 이야기에서 결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아버지와 딸이 어떻게 부녀지간으로서 그 본연의 관계를 회복하는가, 하는 데 걸려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감독은 애초 딸 정은의 입장에서 풀어가던 이야기의 무게중심을 슬쩍 아버지 쪽으로 옮겨놓습니다.

   이를테면, 일종의 〈수렁에서 건진 내 딸〉(1984, 이미례)식의 테마가 이쯤에서 결부되는 셈이지요.

   5천만 원을 미끼로 조직의 보스를 대신하여 3년간의 복역을 끝마친 정은이 애초의 약조대로 대가를 받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이야기는 가파른 극적 상승곡선을 긋기 시작합니다.

   원인은 조직의 돈 문제와 관련한 정은의 배신입니다.

   이런 배신에 대한 조직의 응징은 잔혹하고 끈질긴 법이지요.

   이제 정은은 복역의 대가는 고사하고 조직으로부터 아버지와 동생의 목숨까지도 위협받는 진퇴양난의 궁지에 몰립니다.

   그 자신은 물론 가족의 전면적인 파탄이 눈앞의 위기로 닥쳐온 것이지요.

   마침내 정은은 조직 내부의 갈등에 편승하여 돌이키기 힘든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기로 합니다. 문제의 보스를 제거하는 일을 맡기로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많은 대가를 조건으로 한 일종의 유혹이기도 하였지만, 아버지가 백혈병에 걸려 어린 동생을 두고 머지않아 세상을 떠날 운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탓이기도 합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마침내 아버지!

   결국 아버지가 나서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입니다.

   전직 경찰 신분으로서 범죄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는 아버지가, 아무리 내놓은 자식이라 할지라도, 바야흐로 살인범이 되려는 딸을 어떻게 좌시할 수 있겠습니까.

   영화는 아버지가 딸 모르게 일을 꾸며 딸 대신 스스로를 장엄하게 희생시키는 장면을 딸이 아버지의 애정을 처절하게 깨닫는 장면과 맞물려놓음으로써 극적 효과를 배가시킵니다.

   가족이기주의로 대변되는 저 ‘가족 이데올로기’의 부정적인 속성을 십분 고려하더라도 우리는 마지막 순간 그 아버지의 장렬한 최후가 불꽃처럼 폭발시켜 보여주는 저 가족에 대한, 자식들에 대한, 더 구체적으로는 딸에 대한 한 사내의 무량한 사랑과 헌신에 도저히 무덤덤한 채로 버틸 재간이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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