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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Cinema Aphorism_47

-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47

by 김정수

CA231. 장항준, 〈라이터를 켜라〉(2002)

별 볼일 없는 인생의 마지막 자존심. 왜 인간은 그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려 목숨을 거는가. 동시에 왜 인간은 그 마지막 자존심을 굳이 짓밟으려 드는가. 인간한테는 이성으로 수용하기 힘든, 그래서 전혀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의 불가사의한 메커니즘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아주 상투적이면서도 절실한 전언.


CA232. 레오 맥커리, 〈러브 어페어(An Affaire To Remember)〉(1957)

배 위에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배경으로 캐리 그란트와 데보라 커가 키스하는 장면. 정확히는 데보라 커가 캐리 그란트한테 키스를 요청하느라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며 젖히는 동작. 하지만 이 너무도 뻔한 설정이 기이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는 것. 이것이 바로 지금은 많이 잊힌 멜로드라마 고유의 힘이 아닌지.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1993, 노라 에프론)에서 맥 라이언이 친구와 함께 울면서 보던 바로 그 영화.


CA233. 김인식, 〈로드 무비〉(2002)

이 영화에 비치는 한국의 풍경은 이상하다. 색감도, 구도도, 거기에서 느껴지는 정서도. 이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소중하다. 동성애 설정은 오히려 핵심이 아닌 느낌. 사회의 중심에서 떨려 난 아웃사이더의 이야기. 그래서 이 영화가 주력하는 것은 여러 밑바닥 인생의 행각에 대한 집요한 탐색이다.


CA234. 훌리오 메뎀, 〈루시아와 섹스〉(2001)

표현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고, 그래서 포르노 장르가 확대되면 지금보다 멜로드라마가 훨씬 더 사실적일 수 있으리라는 것을 이 영화는 실증한다. 성기 노출은 이제 중요한 도덕적 판별 기준으로서의 아이콘이 더는 아닌 듯. 덩달아 현실과 환각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따위, 군더더기스러운 기법이 필요치도 않게 되지 않을까. 이 영화의 전언대로라면, 결국 모든 배우는 포르노 배우가 되어야 한다. 적어도 포르노 배우의 저 날것 그대로의 연기법을 체득해 놓아야 한다.


CA235. 로저 도날드슨, 〈리쿠르트〉(2003)

국가정보기관에서 기관원을 양성하는 과정은 고스란히 속임수라는 고리의 끝없는 연쇄에 해당한다. 사기를 많이 당한 사람이 그 결과로 마침내는 사기꾼이 되고 만다는 것. 적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적보다 더욱 적다워져야 한다는, 이 기이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엄중한 현실 논리. 하지만 그들을 양성할 책임자의 충격적인 배신 행각마저 돈이 원인이라는 설정은 어처구니없을 만큼 상투적이다. 동시에 상투적인 만큼 진실에 가깝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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