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48
CA236. 츠루타 노리오, 〈링0-버스데이〉(2000)
그녀는 그렇게 해서 태어났고, 그렇게 해서 죽었다. 그리고 귀신이 되었다. 귀신이 되어서 누군가 비디오를 틀 때마다 나타나 그를 죽인다. 무차별로, 잔혹하게,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아무도 이 저주를 피할 수 없다. 오로지 ‘기술적으로’ 그 저주의 타깃을 바꿀 수 있을 뿐이다. 이는 떠넘기기다. 바로 이 떠넘기는 과정에서 비디오테이프의 저주는 결국 운명의 연쇄 고리가 된다. 아니, 운명의 연쇄 고리임이 마침내 판명된다.
CA237. 박광춘, 〈마들렌〉(2003)
중학교 동창생의 재회와 계약 연애, 그리고 사랑의 확인. 그들이 서로 엇갈린 첫사랑이었다는 설정은 반전을 위한 작위의 혐의가 짙다. 빔 벤더스와 마르셀 프루스트는 어쩐지 영화의 이야기 구조에서 다소 겉도는 소재 구실을 하는 장치로 보인다. 임신과 유산의 경험이 이들 사이에 끼어든 것은 지나치게 상투적인 설정이라는 느낌. 속절없이 눈에 띄는 〈퇴마록〉(1998, 박광춘)과의 거리.
CA238. 나루세 미키오, 〈만국(晩菊)〉(1954)
게이샤들은 일본 사회 속에서 일본 남성들, 특히 전후(戰後) 하이칼라들의 상실감과 절망감을 위로해 주는 아주 구체적인 역할 또는 임무를 수행한 듯. 어쩌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 듯. 이것이 그들의 사회적인 기능이었을까. 또는, 존재 가치였을까.
CA239. 김성민, 〈망나니 비사〉(1955)
왜 망나니는 양반댁 규수와 얽히면 반드시 죽어야 하는 걸까. 1950년대 한국 영화에는 나운규 시대를 떠오르게 하는 연기패턴이 있다. 한 번도 눈으로 확인한 적 없는 나운규의 연기 패턴에 대한 이러한 기시감은 도대체 어디에 연유하는 현상일까. 이는 뒷날의 〈살어리랏다〉(1993, 윤삼육)와는 또 어떻게 설키는 걸까.
CA240. 린 타로, 〈메트로폴리스〉(2001)
오토모 가츠히로 각본. 로봇이 인간성을 배운다는 설정. 거꾸로 그 로봇한테서 진정한 인간성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일종의 반면교사로서의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의 존재. 로봇을 이용한 세계 지배. 인간과 로봇과의 대립. 로봇 때문에 일자리를 잃은 인간들. 로봇한테 그 적대감을 폭력적으로 표시하는 인간들. 그 인간들을 향해 왜 인간들은 폭력적인가를 따져 묻는 로봇.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인간인 줄로만 알았는데, 자신이 로봇으로 밝혀지자 충격을 받는 로봇, 또는 인간. 로봇과 인간의 진정한 차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과연 차이란 것이 있기는 한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