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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Cinema Aphorism_46

-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46

by 김정수

CA226. 허우 샤오시엔, 〈동동의 여름방학〉(1984)

어린이는 ‘그렇게’ 성장한다. 온갖 낯선 것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소식으로만 들려오는 병든 어머니에 대한 불길한 상상을 통하여. 요컨대, 어린이를 성장시키는 것은 어른의 훈육이 아니라, 체험과 상상이다. 감독은 때로 다큐멘터리스러운 관찰자의 시선을 유지하지만, 모든 장면이 아주 섬세하게 ‘연출되었음’을 관객은 알 수 있다. 아니, 모를 수가 없다. 이 또한 감독의 역량이다. 아니, 이것이야말로 감독의 역량이다.


CA227. 이지상, 〈둘 하나 섹스〉(1997)

시(詩)에도 ‘무의미 시’가 있듯, 영화에도 ‘무의미 영화’가 있을 법도 하다는 오랜만의 자각. 꼭 의미를 찾는 방식의 독법이 유효하지만은 않다는 것. 하지만 이 영화는 어쩐지 그 무의미의 의미로움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과감함이 넉넉하다는 느낌은 아니다.


CA228. 로렌스 캐스단, 〈드림 캐처〉(2003)

어쩌면 외계인 콤플렉스는 미국인들의 정신을 ‘건강한’ 상태로 유지하여 주는 일종의 방부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 그들은 언제나 적의 존재를 필요로 하니까. 그래야만 미국이라는 나라의 체제, 그 견고하고 막강한 국가 체제의 존재 이유가 성립할 테니까. 하여, 영화에서 ‘외계인’은 할리우드를 영원히 먹여 살리는 구실을 하기에 가장 손쉽고 효과적인 소재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도 저도 다 없어지고 세계가 문자 그대로 평화를 구가하게 되는 날이 도래하면 할리우드가 우려먹을 소재는 그야말로 마침내 외계인 말고는 없게 될는지도.


CA229. 곽경택, 〈똥개〉(2003)

그는 똥개가 아니라 사람이다. 그런데도 그는 똥개로 불리며, 사람들은 그를 똥개라고 부른다. 심지어 그의 아버지조차도. 바로 그렇게 ‘똥개’로, 그가 계속, 거듭 호명되자, 그는 결국 똥개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가 똥개의 멍에를 벗고 인간이 되려면 똥개보다 더 똥개답게 사는 과정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가 진짜 똥개가 되어버리는 것을 사람들은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진짜 똥개와 더불어 산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악몽이기 때문이다. 악몽을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따라서 그가 똥개에서 인간으로 회복되는 이 영화의 결말은 어쩐지 허황하다. 허황하기 때문에 해피엔딩인 것이다. 그러니 영화가 기본적으로 거짓말이라는 명제는 어쨌든 참이다.


CA230. 이수연, 〈라〉(1998)

단편영화. ‘라’이건 ‘솔’이건 ‘파’이건, 언제나 자신을 조율할 수 있는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기준이 유의미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 언제나 파기될 수 있는 연약한 바탕으로서의 기준이어서는 곤란하다는 것. 그 굳건함의 정도가 그의 어른스러움을 규정한다. 그러니 그는 그 기준의 굳건함을 확보해야 한다. 그래야 다음 단계로, 곧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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