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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Jun 25. 2024

10. …… 호오분연, 합역구저기

  - 〈애오잠병서〉 / 나에 대한 남들의 평가에 대처하는 자세

   운문(韻文)이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문장 단위로 끊어서 보겠습니다.

   한시에서는 대개 두 구가 한 문장의 성격을 이루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첫 문장은 이렇습니다.

   ‘子都之姣(자도지교), 疇不爲美(주불위미).

   ‘아름다울 교(姣)’자에 대해서는 앞서 이미 설명했지요?

   여기서 주의할 글자는 ‘밭두둑 주(疇)’자입니다. ‘누구 수(誰)’자와 같은 의미로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주(疇)’자는 이 문장에서 의문사 구실을 하는 셈입니다.

   ‘위(爲)’자는 ‘말하다’의 의미로 쓰였고요.

   따라서 전체를 번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자도의 아리따움을 누가 아름답다고 하지 않겠는가.

   자도라는 남자가 워낙 출중한 미남이라서 아무도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앞의 ‘교(姣)’자와 뒤의 ‘미(美)’자가 똑같이 ‘아름답다’라는 의미라서 앞의 ‘교(姣)’자를 ‘아리따움’이라고 살짝 변화를 주어봤습니다.

   이어지는 문장도 구조가 똑같습니다.

   ‘易牙所調(역아소조), 疇不爲旨(주불위지).

   이 문장에서는 ‘고를 조(調)’자가 ‘만들(지을) 조(造)’자와 같은 의미로 쓰였다는 것만 주의하면 되겠습니다.

   실제로, ‘음식을 만들다’, 곧 ‘요리(料理)하다’라는 의미의 ‘조리(調理)’라는 말이 지금도 쓰이고 있지요?

   맨 끝의 글자는 ‘맛있을·맛 지(旨)’자니까 번역하면 이쯤이 되겠습니다.

   ‘역아가 만든 것(음식)을 누가 맛나다고 하지 않겠는가.

   역아가 만든 음식은 워낙 맛있어서 아무도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지요.

   여기서는 ‘맛있다’를 ‘맛나다’로 살짝 바꾸어 보았고요.

   마지막은 네 자와 다섯 자로 이루어져서 이 ‘잠(箴)’을 4언시도 5언시도 아닌, 그러니까 이도 저도 아닌 잡언시(雜言詩)로 만든 문장입니다.

   ‘好惡紛然(호오분연), 盍亦求諸己(합역구저기).

   여기서는 중요한 글자가 두 개나 들어 있는 뒷부분을 먼저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덮을 합(盍)’자입니다. 이 글자는 여기서처럼 문장이나 구의 맨 앞에 놓일 때 ‘어찌 ~하지 않느냐?’라는 모양새로 번역해야 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주의해야 합니다.

   ‘모든·여러 제(諸)’자는 여기서 ‘저’로 읽습니다. 이때는 ‘지어(之於)’의 준말로 쓰인 경우이니, 역시 주의해야 하겠지요. 보통 ‘~에서 그것을’ 정도로 번역합니다.

   《맹자》를 비롯하여 여기저기서 이 글자는 이 문장에서처럼 허물을 스스로에게서 찾는, 자기반성의 마음가짐을 표현하는 ‘구저기(求諸己)’의 형태로 곧잘 쓰입니다.

   그래서 이 다섯 글자로 된 구를 번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어찌 또 나한테서 그것을 구하지 않겠는가.

   앞의 네 자로 이루어진 구에서는 ‘분연(紛然)’을 짚어보겠습니다.

   이 ‘그러할 연(然)’자는 어떤 글자 뒤에 붙어서 그 글자를 형용사로 만들어 주는 구실, 또는 형용사의 의미를 강화해 주는 구실을 합니다.

   여기서는 ‘어지러울 분(紛)’자 뒤에 붙어서 ‘분연(紛然)’이 됨으로써 ‘어지러운 모양’이라는 뜻의 두 글자짜리 형용사 단어 구실을 하는 셈입니다.

   그 앞의 ‘악할·모질 악(惡)’자는 여기서 ‘미워하다’라는 의미로 쓰였고요. 이때는 ‘오’로 읽습니다.

   그래서 이 네 글자 구를 번역하면 이런 정도가 됩니다.

   ‘좋아함과 미워함이 어지럽다.

   이제 앞의 네 글자와 뒤의 다섯 글자로 이루어진 두 구를 합하여 그 전체를 번역하면 이렇게 되겠지요.

   ‘좋아함과 미워함이 어지러우면 어찌 또 나한테서 그것을 구하지 않겠는가.

   이 문장은, 남들이 나를 좋아함과 미워함이 어지러우면, 곧 나에 대한 남들의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엇갈린다면, 그러는 남들을 탓할 것이 아니라, 그렇게 평가가 엇갈리게 된 원인을 나 스스로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요즘의 표현으로 하면 ‘내 탓이오’ 정도가 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여기서 ‘그것(之於의 之)’은 바로 ‘나에 대한 남들의 평가가 엇갈리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따라서, 이 ‘잠(箴)’ 부분의 교훈은 다음과 같은 정도로 요약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자도의 아름다움이나 역아가 만든 음식에 대해서는 누구나 다 인정하는데, 나를 두고는 사람들 사이에서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엇갈린다면, 그러는 남들을 탓하기에 앞서 나 스스로 그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부터 해보고, 사람들 사이에서 그런 어지러운(紛然) 평가의 대상이 되어 있는 나 자신을 먼저 반성해야 한다.’

   한데, 이쯤에서 앞의 ‘병서’ 부분과 뒤의 ‘잠’ 부분을 다 포함하여 이 〈애오잠병서〉라는 글 전체를 생각해 보면, 어딘가 약간 이상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왜냐하면, 엄밀하게 따져볼 때 무시옹이 이 ‘잠’을 통해서 하는 말과 앞의 ‘병서’ 부분에서 유비자를 상대로 한 말의 내용이 의미상 서로 조금 어긋나는 느낌이 드는 탓입니다.

   ‘병서’ 부분에서 무시옹은 자신에 대한 남들의 평가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자기 견해를 밝혔습니다. 그 평가의 내용 자체보다도 자신을 평가하는 그 사람이 어진 사람인지 아닌지의 여부가 더 중요하다면서요.

   그래 놓고는 이 ‘잠’ 부분에서 무시옹은 자신에 대한 남들의 평가가 엇갈리는 사태를 놓고 먼저 스스로 반성부터 하겠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이런 것입니다. 나에 대한 남들의 평가가 어떻든 거기에 나는 의연하고 당당하게 대처하겠지만, 평가 자체가 긍정과 부정이 어지러이 뒤섞인 점에 대해서는 스스로 먼저 반성부터 하겠다, 이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자도와 역아라는 분명한 모범 사례가 있으니까요.

   그도 그럴 것이, 의연하게 대처한다고 해서 그 여러 가지 평가를 깡그리 무시하고 독불장군식으로 나아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휘둘려서는 안 되겠지만, 또 그럴 필요도 없을 테지만, 스스로를 반성하는 것은 자기 수양(修養)의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태도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무시옹은 지금 의연하고 당당한 대처와 스스로의 수양을 위한 자기반성이 함께, 동시에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균형 감각이 돋보입니다.

   물론 이것은 당연히 이 글을 쓴 이달충의 생각이겠지요.  *


   〈애오잠병서〉에 대한 저의 글은 여기까지입니다. 제법 긴 글이었는데,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덧붙여, 〈애오잠병서〉 전체를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도록, 앞서 번역하지 않고 넘어갔던 도입부의 번역문까지 합하여 원문(原文) 전문(全文)과 그에 대한 번역문을 좀 더 세련되게 다듬어서 다음의 마지막 글에 부록 삼아 올려놓겠습니다. 좋은 참고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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