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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문)2. 어느 쪽이 어리석은가?

  - ‘조삼모사’ 삐딱하게 따져보기

by 김정수 Jul 04. 2024

文(문)2. 어느 쪽이 어리석은가? / ‘朝三暮四(조삼모사)’ 삐딱하게 따져보기

   ‘조삼모사(朝三暮四)’라는 이 유명한 고사성어(故事成語) 또는 속담(俗談)의 출전(出典)은 《장자(莊子)》의 〈제물론(齊物論)〉과 《열자(列子)》의 〈황제편(黃帝篇)〉입니다. 우리는 이 고사성어를 《장자(莊子)》의 〈제물론(齊物論)〉을 통해서 주로 만나왔지요.

   앞뒤로 내용이 조금 더 붙어 있지만, 《장자》의 〈제물론〉에서 ‘조삼모사’와 직접 관련이 있는 해당 원문은 이렇습니다.     


   狙公(저공) 賦芧(부서) 曰(왈) 朝三而暮四(조삼이모사) 衆狙皆怒(중저개노) 曰(왈) 然則朝四而暮三(연즉조사이모삼) 衆狙皆悅(중저개열)     


   끊어 읽기는 ‘저공 부서 왈 조삼이/모사 중저/개노 왈 연즉/조사이/모삼 중저/개열’ 정도로 하면 되겠습니다.

   저는 다음과 같이 번역합니다.     


   저공이 도토리를 주면서 “아침에 셋이고 저녁에 넷이다”라고 말하자, 여러 원숭이가 모두 성냈다. “그렇다면 아침에 넷이고 저녁에 셋이다”라고 말하니, 여러 원숭이가 모두 기뻐했다.    

 

   여기서는 ‘원숭이 저(狙)’자, ‘줄 부(賦)’자, ‘상수리 서(芧)’자, ‘저물 모(暮)’자, ‘무리 중(衆)’자, ‘모두 개(皆)’자, ‘성낼 노(怒)’자, ‘기쁠 열(悅)’자 정도를 확인하고, 접속어에 해당하는 ‘然則(연즉)’만 조금 더 주의해서 보면 되겠네요.

   번역도 비교적 수월한 편이고, 이 고사성어 자체도 워낙 널리 잘 알려져 있는 탓에 그 내용이나 의미 파악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狙公(저공)’은 ‘원숭이들의 주인’, ‘원숭이를 돌보는(기르는) 사람’, ‘원숭이를 부리는(지휘하는) 사람’ 따위를 뜻하는 명칭이라 특별히 풀이하지는 않고, 대개는 고유명사처럼 그냥 ‘저공’이라고 하거나, 아니면 ‘주인’이라고 합니다. ‘조련사’라고 하는 경우는 드물고요.

   ‘줄 부(賦)’자는 조금 더 상세하게는 ‘나누어 주다’라는 의미인데, 보통 ‘부여(賦與)하다’의 모양새로 잘 쓰이는 말입니다. 이때의 ‘與(여)’자 또한 ‘주다’라는 의미지요.

   문제는 ‘상수리 서(芧)’자입니다. 이 글자는 역자(譯者)에 따라서 그냥 ‘상수리’나 ‘도토리’라 번역하기도 하고, ‘밤’이라고 번역하는 분도 있습니다. 식물학의 분류에 근거하여 엄밀히 구분하면 도토리의 한 종류가 상수리니까 그냥 도토리라고 하는 게 가장 무난하지 않겠나, 싶기는 합니다. 그래서 저는 ‘도토리’라고 번역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아는 상식으로 원숭이는 바나나 같은 과일이 주식일 터인데, 어째서 다람쥐나 청설모의 주식인 도토리일까, 하는 기본적인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모르긴 몰라도 이 이야기를 일종의 우화(寓話)와 같은 차원에서 읽고, 그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 맞는 태도가 아닐까 싶네요.)

   ‘밤’이라는 번역도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 ‘상수리 서(芧)’자에 ‘밤 율(栗)’자를 붙여서 ‘芧栗(서율)’이라고 하면 ‘작은 밤’이나 ‘산밤’을 뜻하는 단어가 되니까요.

   ‘然則(연즉)’은 한문 문장에서 곧잘 쓰이는 접속사 또는 접속부사로, 대개 ‘그렇다면’, ‘그렇다고 한다면’, ‘그러면’, ‘그럼’, ‘그래서’ 정도로 번역합니다. 더러는 ‘그러나’나 ‘그러니’로 번역하는 경우도 있고요.

   제가 새삼스럽게 이 유명한 고사성어를 끌어온 것은 조금 삐딱한 시각에서 이 고사성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착상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조삼모사’는 흔히 ‘원숭이들의 어리석음’과 ‘저공의 교활함’을 동시에 지적하는 의미로 새겨지고 받아들여지는 고사성어지요.(요즘에는 애초의 마음이나 결정이나 계획을 변덕스럽게 자꾸 바꾼다는, 조변석개(朝變夕改) 또는 조령모개(朝令暮改)의 의미로도 많이 쓰이는 느낌이기는 하지요.)

   그도 그럴 것이, '조삼모사(朝三暮四)'와 ‘조사모삼(朝四暮三)’, 곧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와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는 그 총합이 ‘일곱 개’로 아무런 차이가 없는데도 원숭이들은 그 차이를 구분 못하고 아침에 세 개가 아니라, 그보다 한 개 더 많은 네 개를 주겠다니까 좋아했고, 원숭이들의 그런 어리석음을 미리 잘 파악하고 있던 저공은 총합은 하나도 바꾸지 않은 채 ‘교활하게도’ 아침에 세 개가 아니라, 그보다 한 개가 더 많은 네 개를 주겠다는 일종의 ‘감언이설(甘言利說)’로, 그러니까 ‘꼼수’로 원숭이들을 현혹하는 데 성공했으니까요.

   따라서 한쪽은 속았고, 다른 한쪽은 속인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요? 과연 저공은 원숭이들을 속이는 데 성공했고, 원숭이들은 그 저공의 농간에 놀아나 보기 좋게 속아넘어갔다고 단언해도 될까요?

   (물론, 《장자(莊子)》의 〈제물론(齊物論)〉에 나오는 이 대목의 앞뒤에는 ‘神明(신명)’, ‘名實(명실)’, ‘是非(시비)’, ‘天鈞(천균)’, ‘兩行(양행)’ 등 장자 특유의 어렵고도 중요한 철학 개념어들이 포진해 있는 탓에 이걸 그저 하나의 흥미롭고 교훈적인 이야기로만 단순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측면이 있지만, 이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는 따로 적지 않은 양의 지면이 필요할 것입니다.)

   저는 이 ‘조삼모사’ 이야기를 바로 이 ‘어리석음’과 ‘교활함’이라는 필터로 다시금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원숭이들이 어리석고, 저공이 교활하다는 것은 저공 쪽에 기준을 둔 평가입니다. 그러니까 원숭이들이 어리석다는 것은 저공의 생각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이 기준을 원숭이로 바꾸어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이 ‘조삼모사’ 이야기를 원숭이들의 처지에서 다시 생각해 보자는 것이지요.

   이를 위해서는 우선 장자(莊子) 당시가 맹자(孟子)와 동시대인 전국시대(戰國時代)로, 어쨌거나 농경(農耕)문화 시대임을 감안해야 합니다.

   농경문화 시대니까 당연히 저녁 식사보다는 아침 식사가 중요합니다. 누구든 아침―어쩌면 새벽밥이라고 해야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네요―을 넉넉히 잘 먹어둬야 날이 밝음과 동시에 논밭으로 나가서 부지런히 필요한 노동을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한창 일하는 중간이니 점심도 잘 먹어야 합니다.

   하지만 해가 질 무렵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저녁 식사는 그저 허기를 면할 정도로만 가볍게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어서 이튿날의 노동을 위해 충분한 시간 동안 숙면(熟眠)을 취해야 하지요.

   이것이 농경문화 시대에 어울리는 이상적인 생활 패턴, 또는 라이프 스타일 아닐까요. 요즘의 건강학 상으로도 이게 맞다고 하지요?

   이 ‘조삼모사’ 이야기에 나오는 원숭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날이 밝은 뒤에 부지런히 활동하려면 무엇보다도 아침을 든든히 잘 먹어둬야 합니다. 그러니까 원숭이들 처지에서는 아침에 세 개가 아니라, 네 개를 먹고, 저녁에 그보다 적은 세 개를 먹는 것이 훨씬 더 합리적이고, 건강을 위해서도 도움이 되는 일일 것입니다. 실제로, ‘아침은 황제처럼 먹고, 저녁은 거지처럼 먹어라’라는 말도 있으니까요.

   한데도 저공은 원숭이들의 이런 사정은 전혀 헤아릴 줄 모르는 채 이렇든 저렇든 총합이 일곱 개로 같으니, 자신한테는 아무런 손해 없이 마찬가지라는 점에만 혈안이 되어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는 형국입니다.

   저공으로서야 원숭이들한테 아침에 세 개를 주든 네 개를 주든 총지출에는 변함이 없으니 똑같겠지만, 원숭이들한테 이는 아침에 네 개가 아니라 세 개가 되는 순간 자기들 삶의 질 자체가 열악해지는 방향으로 달라질 수도 있는 중요한 사안입니다.

   그러니까 저공은 지금 원숭이들이 매우 어리석다는 처음의 고정관념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저 단순하게, 원숭이들은 애초 어리석게 생겨 먹은 족속이니, 총합이 일곱으로 똑같은 상황을 전혀 이해 못 한다며, 멋도 모르고 속으로 원숭이들을 비웃고 있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저공이 원숭이들의 사나운 기세에 기왕의 자기 뜻을 접고 아침에 세 개가 아니라 네 개를 주겠다고 번복(飜覆·翻覆)했을 때 진짜 승자는 저공이 아니라 원숭이들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원숭이들은 아주 지혜롭게 자기들의 뜻을 굳센 의지로 관철(貫徹)해 낸 것이지요.

   따라서 이 ‘조삼모사’ 이야기에서 어리석은 쪽은, 미안하지만, 원숭이들이 아니라 저공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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