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이 필요해
1. 수량을 세다.
2. 그 수 정도에 이르다. 비교적 많은 수에 이르는 경우를 말한다.
3. 짐작하여 가늠하거나 미루어 생각하다.
나는 철저하게 결과위주의 인간이었다. 힘들거나 어렵더라도 할 때는 티 안 내고 묵묵히 해낸 후, 좋은 결과만이 나에게 유일한 보상이 되었다. 만족할 만한 결과만이 나의 수고와 고단함을 내 입으로 굳이 구구절절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설명될 거라 믿었다. 이런 삶의 반복된 결괏값은 공허함뿐이었다.
연재를 하면서 내 상황을 하나하나 설명해야 하는 글을 통해 치유를 경험하면서 과정의 재미를 알아 가는 중이다. 글을 잘 쓰던 못쓰던 결과보다는 과정자체를 즐겨야 글이 완성된다는 걸 알았다. 경험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배우면서 통찰이 일어난다. 타인에 대한 이해가 생기며 배려를 하게 된다. 상대가 보이는 것이다.
결혼 전이나 엄마가 되기 전에는 길을 가다가 계절에 맞지 않거나 말도 안 되는 옷을 입고, 옷이나 계절에 어울리지 않은 신발을 신은 아이를 보면 ,
“아니 애를 왜 저렇게 하고 다녀?”
의아해했었다. 내가 엄마가 되고 나서 한 겨울에도 샌들이 신고 싶은 딸아이와 실랑이를 하고, 유치원 신발장에 계절에 맞지 않은 신발이 놓여있는 걸 보면 저 아이도 한바탕 하며 결국 신고 나왔구나 싶다.
머리 안 감은 사람을 보면,
“어떻게 씻지도 않고 돌아다녀”
함부로 단정 지었다. 내 아이가 고열로 팔다리가 축 늘어지며 처져있길래 씻기는커녕 버선발로 부리나케 응급실로 뛰어가본 엄마아빠들은 이해를 하겠지. 파마를 하거나 수술을 한 다음날이었거나, 피부관리를 받아 머리에 오일이 잔뜩 묻어있을 수도 있고, 단수였을 수도 있다. 머리를 안 감거나 못 감을 수밖에 없는 각양각색의 이유는 존재한다. 직접 겪어보니 이제서 모두 이해가 간다. 뭐 정말 게을러서 안 감았을 수도 있겠지만 드문 경우라 생각한다.
부끄럽지만 바늘구멍으로 세상을 보았었다. 잘 모르는 이상 판단하지 않기로 했다. 내 잣대로 마음대로 생각하거나 평가하려 하지 않는다. 경험하고 아는 만큼 보이고 들린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천차만별의 이유를 찾는다. 눈에 보이는 대로만 판단하는 게 아니라 ‘무슨 사정이 있을 거야,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겠지’ 하고 말이다. 상대를 이해하고 형편을 살펴주는 헤아림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살도 마찬가지다.
몸이 아파서/ 우울하고 스트레스 상태여서/ 약물중독이거나 그 중독을 이겨내는 경우이거나/ 섭식장애가 있거나/ 운동을 쉬었거나/ 많이 먹었거나/ 대사가 느리거나/ 나이가 들었거나 등등 나름의 사정들이 있을 것이다.
살 좀 빼라
운동해라
그만 먹어라
나도 예전에 진심으로 걱정되어서 친구에게 이런 말을 좋게 돌려서 했었는데, 이젠 내가 이런 말을 듣는 입장이 되었다. 농담이든 정말 나를 위해 우려와 걱정의 말 한마디겠지만, “내가 창피한가?”라는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꼬였다고 하면 어떨 수 없지만 막상 내가 직접 들어보니 자존심이 상하고 기분이 별로다.
반면 나의 상황을 살펴주고 이해를 받아보니 울컥하며 눈물이 먼저 났다. 내 심경과 상황을 알아주고 진심 어린 공감과 위로를 받으니 해내고 싶어 진다.
헤아림을 받아보니 나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어주고 싶다. 헤아리려고 하다 보니 쓸데없는 말은 아끼게 된다.
다이어트는 식이요법이나 운동보다 마음의 위로와 공감이 먼저였고 자기 자신을 안아줄 때 비로소 변화는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