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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미 May 09. 2024

극 I 사람이 당근마켓에서 톡을 받게 되면

관종 양성기관, 당근마켓

 81.4℃

조금만 더 높이면 물도 끓이겠다. 하루에 열두 번,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날락하면 저렇게 뜨거워진다. 부싯돌로 불을 피우듯 오랜 시간이 걸렸다. 호기심으로 당근마켓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만 해도 사람 온기 정도였다. 뜨뜻미지근한 참새 방앗간 단계에 이르니 금단현상이 생겼다. 그리고 어느새 후끈 달아오른 불가마가 되어버렸다. 불러주는 이 없지만, 기어이 오늘도 출근 도장을 찍는 나는 열혈 당근이이다.      


처음 당근을 하게 된 건 순전히 집 정리 차원에서였다. 쓰지 않는 물건을 필요한 이웃에게 건네주고, 현금 수거가 가능하다니 괜찮겠다 싶었다. 구색이 좋다. 계정을 만들고 문을 열었다.      


2021년 3월 코로나 2년 차에 접어든 해였다. 코로나로 중단된 수업은 깜깜무소식이고, 1년째 대기발령 상태다. 방 한구석을 버젓이 차지하고 있던 교구재가 눈에 거슬리기 시작한다. 튼튼영어, 이앤이영어, 청담영어 거쳐 간 곳만 세 군데. 회사별로, 활동 나이별로 교재가 다 제각각이다 보니 그것만으로도 벌써 한 트럭이다. 아이들 시선을 붙잡아보고자 사 모았던 교구는 눈덩이같이 불어나더니 창고 방을 점령했다. 동고동락한 시절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지금은 무더기 짐이 되어버렸다.      


시범 삼아 당근에 올려볼까? 어린이집 파견 영어 수업할 때 사용했던 교사용 교구재가 첫 시험대에 올랐다. 일반 중고거래라면 엄두가 나지 않았을 거다. 큰 상자 두세 개에 모조리 담아 포장하고, 달달 카트를 끌면서 길 떠나 택배 붙이고 송장 찍어 결과보고까지 해야 끝이 난다.      


근데 당근은 초초초 간편 거래다. 출발한다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구매자 선생님이 우리 집 앞에 나타나서는 차에 싣고는 가신다. 벌써 끝이다. 내 손에는 잘 쓰겠다며 쥐여주신 지폐 몇 장이 들려있다.     


 그 거래를 시작으로 집안을 샅샅이 뒤지면서 매물을 찾았다. 사두기만 한 물건을 꽤 발견했다. 언제 샀었나 싶을 정도로 장기 투숙 중인 물건을 끄집어내었다. 아이보리 스타킹이 발굴되었다. 묶어두었던 노란 고무줄이 색이 바래 맥없이 끊어진다. 쌍방울? 얼마 만에 듣는 이름인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거기가 제조사로 찍혀 있다.      

 

처음에는 감이 없어서 시세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고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올려두었다.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서 구매 의사를 밝히는 톡이 온다. 암막 커튼을 7,000원에 내었는데 3분이 채 되지 않아 낙찰되었다. 판매 글을 올리고 톡 다섯 개가 달렸다. 너도나도 사겠다며 줄을 선 것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오겠다며 강한 의지를 보이는 분도 있었다. 내 물건을 찾는 이들이 이렇게 많다니. 덩달아 유명인이 된 기분이다. 한껏 부풀어 오른 마음이 싫지 않다.      

 

온라인 공간이 아니라 실제로 대여섯 명이 우르르 거래 계약서를 들고 왔다면 어땠을까?

난 완전히 긴장했겠지?! 빨개진 얼굴로 얼어붙은 채 어찌할 줄 몰랐을 거다. 줄행랑을 쳤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극 I(MBTI) 사람이다. 웬만해서는 엮이지 않으려고 말을 먼저 섞는 법이 없다. 관심이나 주목을 받는 자리는 항상 어렵고, 불편하다. 내 자리가 아닌 듯하다. 빙 둘러앉아 돌아가며 한 사람씩 이야기라도 하게 되면 입이 바짝 마른다. 내 차례가 되고 참여자의 시선이 쏠리는 순간. 생각만 해도 편하지 않다.      


근데 이상하다. 여기에선 괜찮다. 얼굴이 달아오르지도, 시선이 따갑지도 않다. 감각이 무뎌진 건가, 얼굴이 두꺼워진 건가. 이상할 만큼 아무렇지 않다. 오히려 즐기고 있는 듯한 분위기다. 한발 늦어 구매하지 못한 탈락자 이웃에게 죄송하다며 눈물 이모티콘을 날리는 여유도 부린다. 직접 경험하진 않았지만, SNS나 유튜브에 달린 ‘좋아요’ 개수에 맘이 왔다 갔다 하는 것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끊지 못하고 들락날락하는지도.     


관심받기 싫다고 손사래는 쳤지만, 정작 마음속에서는 갈증이 있었나 보다. ‘단지 그 자리가 어색하고 불편했구나!’ 알게 되었다. 당분간 당근 안전벨트를 차고 유명인 놀이에 재미를 붙여봐야겠다. 당근을 방패 삼아 만땅으로 관심 충전하면 또 다른 모습이 나타날지도 모르니까. 나를 알아가는 이 공간이 벌써 맘에 든다. 어디 또 팔 물건 없나? 서랍장을 열어 뒤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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