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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미 May 13. 2024

천 원인데도 안 산다고?

별 볼 일 없는 가게로 볼일 보러 갑니다.

“천 원, 천 원

대학 졸업여행으로 방콕에 갔을 때다.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일행 말고 한국인이 또 왔나 둘러보는데 웬걸 태국 현지인이었다. 어깨에는 기념품이 가득 담긴 보따리 가방을 메고, 한 손에는 스카프인지 손수건인지 모를 천 쪼가리를 흔들며 호객하는 소리였다. 방콕 현지에 넘쳐나는 한국 관광객을 상대하려면 한국어 구사는 필수인가 보다. 호객꾼은 한국인처럼 보인다 싶으면 성큼성큼 다가가서 어설픈 한국말을 늘어놓았다. 자주 쓰는 표현은 세 가지였다. 일단 “예뻐요.”라고 밑밥을 깔고 “싸요. 싸요.”라고 안심시킨 후 마지막으로 가격을 제시했다. “천 원, 천 원.”     


천 원. 부담 없는 액수다. 쉬운 돈이다. 특히 돈 쓸 생각으로 떠난 관광객에게는 천 원짜리 지폐 한 장 꺼내는 건 일도 아니다. 기분이 내키면 언제든지 출동할 기세로 지갑은 반쯤 열려있다. 그때만 해도 요즘같이 다이소가 판치는 세상이 아니었다. 간간이 시장에 ‘천냥 백화점’이라는 간판이 걸린 잡동사니 가게가 보이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천 원의 체감 가격은 밑바닥일 수밖에. 백 원짜리 크기에 앙증맞은 아로마 초 3개 묶음이 천 원이란다. 완전 거저 준다. 기념품 가게에서 고를 선물을 길거리표로 샀다. 가격표가 붙은 정품과 크게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여행 기념으로 물 건너왔다고 생색내며 부담 없이 돌리기엔 더없이 좋은 물건이었다.    

  

그렇지만 생각보다 물건은 허접했다. 일회용도 아닌데 두 번은 못 쓸 것 같이 부실했다. 후회하기엔 이미 버스는 떠났다. 천 원이니까 봐준다며 혼자 다독거렸다. 알고 보니 현지 돈 ‘바트’로 받는 것보다 원화(₩) 거래가 환율을 따졌을 때 노점상으로서 유리하단다. 환차익까지 고려한 치밀함에 놀아난 건가? 두 번 속은 기분이다.     

내 당근마켓도 천원상점이다. 일명 짝퉁 다이소. 매대에는 천 원짜리 물건이 꽤 있다. 락앤락 플라스틱 물컵 세트, 계량 볼 세트, 꽃무늬 블라우스, 샤스커트 등등. 다른 것도 이, 삼천 원이면 산다. 비싸 봤자 오천 원을 넘지 않는다. 판매 가짓수도 얼마 되지 않아 애들 소꿉놀이 수준이다.
 

처음부터 천 원은 아니었다. 중고지만 나름 물건의 효용성을 따져서 값을 매겼다. 극히 주관적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집값은 올라도 물건값은 똥값 되기 마련이다. 낮추고 낮추다 보니 1,000원까지 내려갔다. 그만큼 많이 묵혔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쯤 되면 가격을 0으로 완전히 내려서 시원하게 쏠 법도 한데 그게 쉽지 않다. 자존심이 걸린 문제 같다. 다음에 기회가 생기면 거저 주는 게 얼마나 어려운 숙제인지 이야기해 보고 싶다.      

코 묻은 돈이면 구매할 수 있는 물건이지만 문제는 안 팔린다. 손님 대신 파리만 날린다. 창고에 2년 넘게 쟁여둔 물건도 있다. 당근마켓이라 다달이 나가는 월세가 없어 다행이지 폐업 신고감이다.    

 

판매가 저조한 이유, 두 가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별 볼 일 없는 물건만 팔고 있다.

내게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물건 다른 사람에게도 쓰레기일 수 있다. 미련 때문에 버리지도 못하고 되레 떠넘기고, 돈을 내놓으라는 식이다. 창고 대 개방에 덤핑 처리한다 해도 크게 달라질 건 없다.      


둘, 나만큼 ‘싸요 싸요.’를 외치는 판매자가 늘었다. 중고품, 신품 할 것 없이 저가 판매 전략을 내세우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이럴 땐 '이뻐요.' 멘트를 날리며 환심이라도 사야 할 텐데 온라인이라 어쩔 수 없다. 막상 그런 말을 내뱉을 용기도 없으면서 큰소리다.      


‘이뻐요.’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는 나름의 판매 전략이 있긴 하다. 찾아가는 서비스. 

“가까운 곳은 가져다 드립니다.”

보통은 판매자 거주지 주변으로 거래 접선 장소가 정해진다.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고 필요한 사람이 구매하러 오는 식이다. 바쁜 현대 당근이를 위해 시간에 여유가 있는 내가 운동 삼아 나서기로 했다. 물론 이 방법도 물건이 좋았을 때 통한다. 값싸고 좋은 물건이 널린 요즘에는 가격만으로 승부를 보긴 어렵다. 그만큼 살기 좋은 풍족한 세상이 되었음에 위안이라도 삼아 본다.     


나는 천 원짜리 물건을 보면 눈이 번쩍 뜨인다. 당장이라도 사려고 안달이 난다. 당근마켓에서 천 원짜리 물건을 몇 번 샀는데 200% 만족했다.  내 소비 행태를 보면 종류에 상관없이 구매 후 만족도를 결정짓는 요소는 바로 '가격'이다. 물건의 사용 가치를 따지기보다는 가격이 저렴할수록 득템 했다며 뿌듯해하는 내 모습을 자주 목격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천 원이라는 말에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기대 없이 받아 든 물건은 웬만해서는 그 이상이기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설사 진짜 구질구질한 물건이라 하더라도 ‘천 원짜리가 별수 있겠어.’ 하며 툴툴 털어내면 그만이다. 아쉬움이나 후회도 적다.     


천 원의 행복을 알기에 천 원짜리 물건을 팔고 싶다. 가격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천원상점은 매력적인 곳은 아닐 거다. 그렇지만 나 같이 천원상점을 좋아하는 이도 있을 거니까. 손님 오시길 기다리며 계속 영업해 보려 한다. 

“어서 오세요. 최대 만족으로 보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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