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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glecs Aug 01. 2024

불꽃 같은 삶

겨울 이야기 - 넷

 '그날이 언제 올지 모르니 늘 준비하고 대비하라' 라는 글귀를 본 적이 있다. 성경에서 나온 말 같기도 한데 아무튼 늘 죽음을 대비하고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라는 것이다. 나의 '그날'이 언제 올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내가 알 수 있는 명확한 사실은 '그날'은 반드시 온다는 것이다........... 나의 얼마 남지 않은 '눈 깜빡할 사이'를 어떤 순간으로 채울지가 지금 시점에서 나의 가장 중요한 사색 거리가 되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큰 고민거리라도 죽음 앞에서는 사소한 일이다.






찰나의 삶


  모든 살아있는 것은 때가되면 그 기능을 멈춘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예외가 없다. 물론 수 천 년을 살면서 인간의 거의 모든 역사가 벌어지는 순간을 함께해 온 거대한 나무와 같이 인간 삶의 길이와 비교할 수 없이 긴 생을 사는 생명도 있다. 거북이도 수 백 년을 산다. 그에 비하여 인간은 고작 80년 내외를 산다. 백세를 사는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는 80전후면 생을 끝낸다. 사실 건강 나이를 고려하면 70전후면 거의 온전한 한 인간으로써의 육체적 활동은 막바지에 이른다. 그리고 80전후의 나이가 되면 정신이 비록 온전하더라도 몸뚱아리가 제기능을 절반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삶을 제대로 산다고 하기에 민망한 지경에 이르곤 한다. 간혹 TV에 나오는 백수(白壽)하시는 정신도 또렷하고 여전히 밭일을 하는 어르신을 보면서 바야흐로 백세시대가 정말로 모두에게 왔고 따라서 그런 삶이 내게도 당연하다는 착각에 빠지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가능은 하지만 확률은 대단히 낮다. 그런 분은 복권에 당점된 사람을 보는 것 이상으로 만나기 어렵다. 삶의 부질없음과 짧음을 한탄하는 말이 아니라 그냥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다른 의도는 없다.  

 

 아무튼 인간의 80년이든 거북의 수 백 년이든 나무의 수 천 년이든 결국 모든 살아있는 것은 주어진 생명의 시간을 다하면 그 맥동의 멈춤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다만 자신이 매우 제한된 삶의 시간만 주어진 '순간을 사는 불꽃같은 생명'임을 믿고 싶지 않을 뿐일 것이다. 그냥 애써 외면하면서 평생을 살아갈지도 모른다. 끝이 올 줄은 알지만 나만은 아닐 것 같은 착각에 빠진 것처럼 말이다. 사실 인간은 마지막 순간에 불꽃이 된다. 대부분 화장장에서 화장을 하니 말이다. 1,400도에서 1,800도에 이르는 화장장 화로의 거대하고 강력한 불꽃 속에서 60% 이상의 수분과, 15% 내외의 단백질 그리고 지방 등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몸은 밝은 불꽃을 내다가 몇 줌의 재로 변해서 다시 자연으로 환원된다. 삶의 불꽃의 지속 기간은 서로 많이 다르지만 모든 인간의 삶의 불꽃은 그렇게 거의 비슷한 방식으로 꺼진다. 그리고 공평하게 모든 인간에게 적용된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그간 살아온 시간을 되돌아 보면 정말 눈깜빡할 정도로 빠르게 시간이 지나갔다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말은 정말이다. 내가 30년간 한 직장에서 일한 것도 그 뒤를 돌아다 보니 정말 순간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아마 내게 남은 시간을 다 보낸 후 삶의 마지막 순간에 뒤를 돌아볼 기회가 생긴다면 아마도 '눈깜빡할 사이에 내 삶이 끝나 버렸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타인의 죽음


 중년 정도의 나이에 이른 사람이라면 지금까지 삶을 살아오면서 주변 사람들의 죽음을 여럿 겪었을 것이다. 그중 가족의 죽음은 너무도 커다란 슬픔을 주기 때문에 그 위력에 압도되어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가까운 가족의 죽음에서는 무언가를 배울 여유가 거의 없다. 그리고 그렇게 큰 슬픔 속에서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도 좀 이상하다. 나의 경험에 따르면 오로지 슬픔과 상실감 그리고 허전함만을 느꼈던 것 같다. 


 반면 사회에서 알게 된 사람들의 죽음의 경우는 또 다른 감정을 일으킨다. 일반적으로 상가집에 방문하여 조문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분이지만, 사회적 관계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측면에서 형식적 혹은 의무적 조문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경우에는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고 명복을 빌 뿐이다. 그러나 비록 사회에서 연을 쌓은 경우라도 특별하게 가까웠던 사람의 죽음은 상당히 복잡한 감정을 일으키곤 한다. 나의 경우는 그들의 죽음으로부터 뭔가 배웠다기 보다는 그저 나의 삶을 좀 더 되돌아 보고 앞으로 어떻게 남은 삶을 채우는 것이 좋을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사회적으로 꽤 높은 위치에서 부족하지 않은 부를 쌓은 한 분이 요즘 기준으로는 비교적 젊은 70대 초반에 지병으로 돌아가셨던 적이 있었다. 나와 아주 친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꽤 가까운 거리에서 함께 일을 했었기 때문에 조문을 가서 마지막을 배웅해 드렸던 기억이 나는데, 그분의 밝게 웃고 있는 영정 사진을 보았을 때 그냥 좀 안되었다는 생각 밖에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었다. 그가 악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결코 타인에 대하여 배려를 한 적도 별로 없는 분이었기 때문에 그분의 죽음이 내게 거의 아무런 감정적 반응을 이끌어 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의 삶이 헛되고 질이 떨어졌다는 뜻은 아니다. 나름대로 훌륭하게 자식들을 키웠고, 오랜 기간 재직한 회사에서도 자신의 역할에 꽤 충실했기 때문에 높은 위치까지 올랐다. 그리고 상당히 머리가 좋은 편이었기 때문에 많은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그도 나름대로 그에게 주어진 시간을 치열하게 살다가 삶을 마치고 떠나간 것이니 그의 삶도 존중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삶은 존중하지만 미안하게도 존경심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사실 내 기억에 가장 깊게 새겨진 '죽음'은 매우 평범한 한 사원의 죽음이었다. 그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병으로 발병 후 불과 몇 일만에 삶을 마칠 수 밖에 없었다. 벌써 10년이 훨씬 더 지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음에 대한 생각은 여전히 내 기억에 분명하게 머물고 있다. 그는 평범한 사원이었기 때문에 조직 내에서의 위치도 매우 낮았다.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넉넉한 편도 아니었다. 결혼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식을 낳지도, 키우지도 못했다. 아주 뛰어난 스펙이나 학력을 갖고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평범한 일을 하면서 직장생활을 이어간 지극히 일반적인 사람일 뿐이었다. 위에 언급한 70대 초반에 돌아가신분처럼 그도 나름 그에게 주어진 시간을 자신의 방식대로 '치열하게 살다가 간 것'이고 따라서 그의 삶 또한 존중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내가 본 관점에서 그가 살아낸 그의 삶의 방식은 존경한다. 


 전자의 죽음과 후자의 죽음은 생물학적으로 동일한 죽음이지만, 그들의 삶의 방식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차이로 인하여 나는 후자에 대하여 더 깊은 슬픔과 아쉬움을 느꼈던 것 같다. 그가 내 기억속에 남은 비결은 특별하지는 않다. 그는 단지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았었다. 그의 얼굴을 회상하면 미소 띤 모습 밖에는 기억에 떠올릴 수가 없다. 그는 언제나 친철했다. 목소리를 높인적도 없을 뿐더러 늘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언제나 모든 면에서 타인을 배려하려고 노력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언제나 도움의 손길을 주저하지 않았다. 물론 도움이라고 해도 그의 조직내에서의 위치로 인하여 별다를 것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진정한 마음은 언제나 내게 전해졌다. 그는 자신의 시간을 희생하면서 주변인들을 많이 도우려고 노력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내어주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그에게 주어진 삶의 많은 순간을 타인에 대한 작은 정성과 성의 그리고 배려와 사랑으로 채웠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내게 있어서 여전히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에 대한 좋은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여전히 내 얼굴에는 그의 미소와 닮은 옅은 미소가 지어진다. 이미 꽤 오랜 시간이 흘러서 그의 부재로 인한 슬픔은 거의 가셨지만 그에 대한 아련한 아쉬움 그리고 그 사람에게서 발산되었던 깊고 우아한 향은 여전히 내 주변의 대기에 잘 지워지지 않는 흔적처럼 남아있다.     




진정한 삶의 완성


 인간의 삶은 어떤 식으로 완성될까? 우리는 사회적 배경과 힘, 그리고 각자가 가진 부의 크기에 따른 다양한 삶의 스펙트럼을 경험할 수도 있다. 그리고 부(富)라는 수단을 통하여 타인에게 큰 도움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수단이 없어도 다른 식으로 아름다운 삶은 완성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후자의 삶은 그런 식으로 완성된 아름다운 삶이었다고 생각한다. 비록 너무 짧아서 아쉬움이 크지만, 짧았던 것 이상으로 긴 여운으로 남은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여전히 강한 향기를 뿜고 있기 때문에 그는 어쩌면 아직도 살아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날이 언제 올지 모르니 늘 준비하고 대비하라' 라는 글귀를 본 적이 있다. 성경에서 나온 말 같기도 한데 아무튼 늘 죽음을 대비하고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라는 것이다. 나의 '그날'이 언제 올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내가 알 수 있는 명확한 사실은 '그날'은 반드시 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나의 연령 그리고 대한민국 평균 남성의 수명을 고려하면 그리 멀지도 않았다. 직장생활 30년도 눈깜빡할 사이인데, 앞으로 남은 30년 또한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나의 얼마 남지 않은 '눈 깜빡할 사이'를 어떤 순간으로 채울지가 지금 시점에서 나의 가장 중요한 사색 거리가 되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큰 고민거리라도 죽음 앞에서는 사소한 일이다. 단지 내가 지금도 가끔 머리속에 생각을 떠올리면 아련하게 그리워하는 '그' 처럼 배려와 사랑, 친절과 미소로 내게 주어진 남은 시간을 채워간다면 삶의 끄트머리에서 크게 후회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이렇게 나의 잔여 시간을 성공적으로 채워진다면 나의 '마지막 불꽃'은 그 자체만으로도 진정 찬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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