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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glecs Aug 01. 2024

외로움 수업

겨울 이야기 - 여섯

 그렇다면 혹시 우리는 외롭지도 않고 고독하지도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끊임없이 세뇌된 것은 아닐까? 우리는 어쩌면 외로운 것이 아니라 욕망이 과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면 과거엔 욕망이 과하지 않았다는 말이냐는 질문이 나올 수 있을텐데, 맞다. 과거에는 지금 시대와 비교하여 욕망이 과하지 않았다. 








 현대인의 고독


 현대인은 고독하다고 한다. 그러면 옛날 사람들은 고독하지 않았을까? 아마 그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고독했을 것이다. 물론 고독한 사람의 비율은 현대 보다는 꽤 낮았을지도 모른다. 왜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일단 지금 보다는 삶 혹은 생활의 속도가 매우 느렸고 사회적으로는 좀 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정서적으로 더 풍족했을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정서적 안정은 외로움을 경감시켜 주니 덜 외로웠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다른 문화권에서는 상황이 어떠했는지 잘 모르지만, 일단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80~90년대만 해도 동네 주민과 인사라도 하고 다니고 어느 집에 어떤 일이 있는지 서로 대충은 알았던 것 같다. 당시의 보편적인 거주 형식이 현재와 같은 수직으로 뻗은 고밀도의 집단 거주 형태가 아닌 평면으로 펼쳐진 개인 주택의 비중이 높았기 때문에 이웃간의 교류 빈도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따라서 가족 이외의 사람들과도 정서적 교류의 빈도가 높을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고 이런 환경적 요소는 개인이 느끼는 고독의 강도를 낮추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파트에 거주하는 인구가 절반 이상이다. 2020년 통계 기준으로 전체 인구중 아파트 거주 인구가 51% 였으니 2024년인 지금도 여전히 총 인구의 과반수가 넘는 사람이 아파트에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이웃간의 교류가 거의 없을 것 같다. 나 역시 아파트에서만 25년째 거주중인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주민과 긴밀한 관계를 수립한 적이 없다. 엘레베이터에서 만났을 때 인사하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러나 옆집 사람과 우연히 마주쳐서 목례를 하는 정도를 교류라고 하면 안 된다. 음식도 나눠 먹고, 집에도 놀러가고, 그집 아이들은 누구 누구이고, 어른들은 어떤 일을 하는지 정도는 알아야 정서적인 풍요로움에 기여할 수 있는 '교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 나라 인구의 50% 이상이 집단 거주를 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중 꽤 많은 사람들이 반강제적으로 주변인들과의 정서적 교류를 차단당하고 있고 이는 고독과 외로움을 느낄 수 밖에는 없는 현대인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집단 거주 형태는 왜 사람들간의 교류를 차단할까? 그 이유는 일단 타인이 나의 집을 그리고 그 반대로 내가 타인의 집을 볼 수 있는 방법이 문을 서로 열어 주고 출입을 허용하지 않는 이상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거의 주거 형태는 평면적이었다. 그리고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어도 그 내부를 어느정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옆집에 누가 살고 있고 몇 시에 누가 안마당에서 무얼 하고 그리고 저녁때 다들 귀가를 했는지도 대충 알 수 있었다. 방에 불이 켜진지 아닌지만 봐도 간단하게 알아챌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 프라이버시를 심각하게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억지로 말을 섞지 않아도 이웃간의 사정을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는 형태의 거주 형태였던 것이다. 이렇게 이웃간의 교류는 자연적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삶의 형태였기 때문에 지금과 비교할 수 없는 교류의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태반의 인구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과거와 비교하면 거의 수감생활과 다를 바 없다. 그러니 죄수들끼리 교류가 될리가 없다. 그리고 죄수는 외로움을 피하기 어렵기도 하다. 


 고독한 이유는 사람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속한 문화마다 천지차이일 것이다. 고독은 세상에서 홀로 떨어져 있어서 너무 쓸쓸한 상태를 말한다. 외톨이가 된 듯한 느낌과 유사할 것이다. 고독감을 느끼는 이유는 다양하다. 사회적인 연결의 부족, 감정적으로 겪는 어려움, 스트레스, 그리고 개인의 독특한 성격 등 고독감을 느끼게 하는 이유는 수 만 가지는 될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이유로 외로움을 느끼겠지만 또 하나의 큰 이유는 인간의 욕망 때문이 아닐까? 물질적인 측면의 상대적 박탈감에서 오는 외로움은 상당히 크며, 그런 물질적 박탈감의 기저에는 인간의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남들과 주로 물질적인 측면에서 비교하면서 자신을 그들과 구분하게 되면 결국 홀로 따로 남아서 외로움에 휩싸이게 된다. 이러한 물질적 욕망에 기인한 외로움도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정신적인 만족감을 느끼지 못한 여파로 외로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자신의 내면이 풍요로우면 정신적으로 외로움을 덜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내면 말고 외면에서 오는 외로움도 있기 때문에 자신의 내면만 풍요롭다고 해서 완벽하게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따라서 주변인들과의 관계를 정립하고 이어 나가면서 정서적 교류를 하게 되며 그 과정 속에서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이런 경우 외로움을 느낄 틈이 줄어들게 되는데, 그런 정서적 교류가 줄면 그에 비례하여 고독감이 일어날 가능성은 늘어날 것이다. 




 나는 고독한가?


 사실 잘 모르겠다. 그러나 고독의 정의가 '세상에서 홀로 떨어져 있어서 너무 쓸쓸한 상태'라면 나는 절대로 고독하지 않아야 한다. 기술의 발달 덕분에 온 세상과 연결되어 있어서 전혀 쓸쓸하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퇴직해서 혼자 집에 있으면 일단 '세상에서 홀로 떨어져서 외롭고 고독할 것'이라고 생각할텐데 정작 나는 거의 그렇지가 않다. 스마트 TV는 온 세상과 연결되어 24시간 내내 내가 원하는 정보를 전달해 준다. 퇴직 후에 새로 구입한 노트북을 통해서도 역시 다양한 정보의 실시간 검색이 가능하고 알고 싶은 지식의 탐구도 즉시 가능하다.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휴대폰을 통하여 쉴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각종 뉴스와 같은 '나하고 상관도 없는 일'에 신경쓰느라 외롭기는 커녕 오히려 바쁠 지경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하여 '전혀 외롭지 않다'라고 명확히 말하기도 애매하다.  


 퇴직이건 실업이건 혹은 이혼이건 어떤 이유로든 소속된 곳이 없으면 일단 소속감이 떨어지고 그로 인하여 자존감도 떨어지고 결국 스트레스를 받게 되며 이게 지속되면 심각한 외로움에 빠져 급기야 우울하고 고독한 사람으로 스스로를 낙인찍고 결국은 누가 부여하지도 않는 '외로움 자격증'을 스스로에게 수여하고 외롭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관점이 낯이 설겠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딱히 틀리말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는 외롭거나 고독하지 않은데 그렇다고 스스로 믿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관점 말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외로움에 대한 자기만의 특별한 정의가 필요 할 것 같다. 




당신은 왜 외로운가?


 나는 고독하지도 외롭지도 않다고 위에 기술해 놨다. 정말 외로운데 스스로 비참해지기 싫어서 자기최면을 걸면서 '나는 고독하지도 그리고 외롭지도 않다'라고 반복 학습을 하는 것은 아니다. 고독의 정의는 '세상에서 홀로 떨어져서 너무 쓸쓸한 상태'이다. 이런 정의 대로라면 외롭기는 정말 어렵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세상에서 떨어지려면 죽을 수 밖에 없다. 심지어 죽기전에 세상에서 떨어져서 혼자 살고 있는 '자연인' 같은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도 외로움을 느끼기 보다는 혼자사는 유유자적한 삶을 즐기는 편이다. 그들 조차 외롭지 않은데 하물며 사회 속에서 삶을 살고 있는 우리가 정말로 외롭거나 고독하기는 정말 어렵지 않을까?


 따라서 당신이 만약 쓸쓸하거나 외롭다고 생각한다면 왜 그런지를 해부해 봐야 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이 정말 고독하고 외로운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을 통해서 나는 외로움 혹은 고독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 궁극적으로는 그 은밀한 내부를 들여다 보고 있는데, 이 글을 보는 독자들도 그런 기회를 갖기를 바란다. 


 아무튼, 좀 더 간단하게 말하면 여기서 '외로움'이란 뭔지에 대한 문제를 풀어 보려고 하는 것이다. 일단 문제가 주어졌으면 그걸 풀어야 하니가 말이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큰 시험 과정을 살아내면서 오랜 시간을 지내왔다. 그 과정 중에서 우리는 많은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학창 시절엔 실제로 시험을 보면서 문제를 풀고, 사회인으로써 직장 생활을 할 때는 일과 관련된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면서 삶을 채워간다. 학창 시절이나 사회인의 삶을 살 때에도 외로움을 많이 느낄 텐데, 어딘가에 소속된 상황이 아닐 때라면 조금 더 외로움이라는 '문제'에 휘둘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더욱 외로움이라는 '문제'에 대한 해부가 필요하다. 우리가 외로움에 먹히지 않으려면 그 실체를 봐야 한다. 




외로움의 실체


 당신이 겪고 있는 고독 혹은 외로움의 실체는 무엇인가?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내가 그걸 여기서 다 풀어낼 수는 없다. 나도 간혹 고독하고 외롭다고 느낀 적이 있었는데 그때를 회상하며 '내가 느꼈던 외로움의 실체'를 해부해 보면 내가 잠시 느꼈던 그 외로움 혹은 고독은 그냥 나의 과도한 자아에 휘둘린 한 상태에 불과했지 절대로 외롭거나 고독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내가 외로움 혹은 고독을 느꼈을 때는 재직 말년에 사무실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을 때였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특별한 일도 없어서 무료함을 느꼈다. 젊은 실무진들은 바쁘게 전화 통화를 하면서 하루를 긴장 속에서 보내는데 내 사무실은 거의 선방(禪房, 참선하는 방) 수준으로 적막했다. 내가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때 느꼈던 나의 고독 혹은 외로움에 대한 사실을 해부해 보면 나의 조직이 정말 견실히 잘 돌아가고 있었고, 훌륭한 사원들이 정말 일을 잘했기 때문에 내게 아무런 골치거리가 없었던 것이지 내가 외롭거나 고독했던 것은 아니었다. 물론 자잘한 문제가 없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나보다 훨씬 더 훌륭한 중간 관리자들이 거의 완벽하게 대응하여 문제를 거의 모두 해결해 줬기 때문에 그 어떠한 잡음도 그들의 그물을 벗어나서 내게까지 흘러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내 조직에 속한 중간 관리자였던 이유는 그들이 단지 나보다 더 늦게 입사를 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와 함께 일했던 중간관리자들은 정말 너무나도 훌륭했고 존경받아 마땅했다. 퇴직을 한 지금도 그들에 대한 감사함은 1%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그렇게 훌륭한 그들 덕분에 내 방은 禪房이 된 것이다. 물론 그들은 온갖 문제를 해결하느라 힘이 들었을 것이지만 말이다. 따라서 내가 느껴야 할 것은 고독과 외로움이 아니라 평온과 자유로움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배부른 고민이었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감정은 대부분 상대적이다. 내가 아무리 부유해도 나보다 더 부유한 사람과 비교하면서 비탄에 빠진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말이 바로 그 말이다. 그렇다면 혹시 우리는 외롭지도 않고 고독하지도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끊임없이 세뇌된 것은 아닐까? 우리는 어쩌면 외로운 것이 아니라 욕망이 과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면 과거엔 욕망이 과하지 않았다는 말이냐는 질문이 나올 수 있을텐데, 맞다, 과거에는 지금 시대와 비교하여 욕망이 과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타인과의 비교에서 욕심과 욕망이라는 감정이 생기는데 과거 30~40년 전에는 거의 대부분 생활 수준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부유한 가정이 있었지만 별로 없었고, 대부분의 일반적인 가정은 그냥 밥이나 먹고 사는 정도였다. 거의 대부분의 집에 자동차같은 고가의 재산은 당연히 없었다. 심지어 냉장고도 없는 집이 태반이었다. 명품백을 가진 사람들도 거의 없었다. 아이폰도 없었고 맥북도 없었다. 이렇게 물질 자체가 희귀한 시대였다. 그래서 비교할 대상이 적었고 이는 우리의 욕망을 키울 만한 불쏘시개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글을 쓴 이유는 퇴직으로 인하여 사회적으로 혼자된 이후 혹시 내가 외로운가? 라는 의문이 들어서 이 기회에 나를 관찰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진단 결과, 나는 외롭지 않았다. 물론 예상 대로다. 내가 퇴직 전에 느꼈던 일종의 외로움 혹은 고독 같은 감정 상태를 이번에 해부해 보니 그것은 고독과 외로움이기는 커녕 오히려 평온과 자유로움이었던 것 같다. 단지 과거보다 더 여유로워진 것인데 그 여유로움을 어떻게 대할지 몰랐던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은 더 시간이 많아져서 그때보다 더 평온하고 자유롭다. 오직 기뻐해야할 상황일 뿐이지 이걸 외롭거나 쓸쓸하다고 오해하며 어쩔줄 몰라할 이유는 어디를 봐도 찾을 수가 없다. 


 혹시 외로움 혹은 고독을 느낀다면 그 실체를 해부해 보길 바란다. 아마도 그건 진정한 외로움이나 고독이 아닐 가능성이 꽤 높을 것이다. 우리는 정말로 외롭거나 고독하지 않을 가능성이 꽤 높다는 것이다. 절대로 그냥 막연하게 드는 감정에 압도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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