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이야기 - 둘
자기를 과시하는 원인은 다양할 것이다. 그 원인으로는 자존감 부족, 두려움, 욕심, 욕망, 피해의식 등과 같은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자기를 과시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그렇게 보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애써서 먼저 자신이 스스로에게 기대하는 모습을 투영하여 타인에게 직간접적으로 그 모습을 받아 들일 것을 강요하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 해석해도 저급한 행태로 밖에는 볼 수 없을 것 같다.
'우리가 되어야 할 사람'은 겸손한 사람 그리고 약간 손해를 감수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만나려고 노력하고 우리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 관계에서는 약간 손해를 보는 것이 좋다는 말인데, 이것은 내가 재직시 늘 사원들에게 했던 말과 정확히 일치한다. 만원을 둘이 나눠 가지라고 하면 당신이 4900원 갖고 상대방에게 5100원을 주라는 이야기이다. 더 큰 양보를 하면 더 좋다. 결론은 아주 조금이라도 내가 손해를 보는 것이 건설적인 인간 관계를 수립하는데 매우 요긴하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유튜브 사랑은 유명하다. 엄청난 인터넷 인프라 덕분일 것이다. 온 국민이 휴대폰을 몸에 달고 다니고 집에서도 휴대폰은 물론이고 스마트 TV를 통해서도 언제든지 유튜브에 접근할 수 있다. 그때문에 TV 보다는 유튜브를 시청하는 시간이 오히려 더 많다고도 한다. 과유불급이니 유튜브 시청도 적당하게 통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모든 일들이 양면성이 있기 때문에 좋지 않은 점이 있다면 좋은 점도 있다. 유튜브의 좋은 점 중 하나는 다양한 정보를 손쉽게 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튜브에서 재미를 쫓기도 하지만 그 중간 중간에 도움이 되는 좋은 내용을 만나기도 하는데 최근 그런 값진 영상을 보게 되어 다시 되새기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한다. 이 글의 내용은 유영만 교수의 유튜브 영상에서 언급된 것인데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내용을 자주 이야기해 왔기 때문에 특별하고 획기적인 정보를 주기 보다는 매우 익숙한 '다 아는' 내용을 복습하는 일이 될 것이다. 나 역시도 영상을 보기 전에도 다 알고 있었던 내용이다. 그래서 전부 공감가는 내용이었다. 유영만 교수의 유려한 말솜씨와 쉬운 사례를 들어가면서 진행하는 재미있는 내용이 궁금한 분들은 유튜브를 참고하기 바란다.
우리는 주변 정리를 주기적으로 해야 한다. 집도 정리해야 하고 통장도 정리해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람 그리고 그들과의 관계 정리에는 소홀한 편이다.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이권(利權)이 걸려있을 수도 있고 내가 약자인 경우 그 정리가 내 뜻대로 되기 어려운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당신이 당신의 삶을 그런대로 버텨왔다면 어쩌면 주변 사람들이 그래도 견딜만 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정리의 필요성이 적었을 수도 있다. 아무튼 이번 기회에 다시 내 주변을 돌아보고 동시에 나 스스로도 살펴서 과연 나는 그런 '피해야 할 사람'은 아닌지도 돌아볼 생각이다.
특히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만나서 끊임없이 소통해야 하는 직장인들의 경우는 더욱더 사람을 가려서 만나야 할 것이다. 휴대폰에 천 명이 넘는 사람이 저장되어 있어도 실제로 어려울 때 도움이 될 만한 사람, 진정으로 배울 점이 있는 사람, 진짜 평생 친구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을 꼽자면 쉽지 않을 것이다. 아마 대부분은 나중에 이직을 하거나 퇴직을 해서 사회적 연결고리가 끊어질 경우 더이상 의미가 없는 관계가 될 것이다.
오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수 많은 관계를 수립하려고 엄청난 비용과 시간 그리고 정력을 쏟는 사람이 많은데 어쩌면 그들은 전혀 쓸데 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사람을 너무 가려서 사귈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피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는 구분해 가면서 사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유교수는 단정적으로 말했다. '이런 인간을 만나지 마세요.'라고.
귀막고 자기 이야기만 하는 사람이다. 특히 고직급자 중에 이런 사람이 많지만 하급자의 경우에도 유독 발언권을 가로채서 자기 이야기만 하는 사람이 있다. 최근에도 그런 경험이 있었는데, 결국 그 자리에서 얻은 것은 정신적 피로감 뿐이었다. 그나마 하급자와의 대화라면 가볍게 면박을 주던가 아니면 양해를 구하고 어느 정도 끊을 수가 있기 때문에 겪어야 할 고통의 시간은 짧을 수 있는데 상급자가 그런 사람이라면 내가 고통의 시간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곤혹스럽다.
사실 나도 내 이야기만 주절댈 때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일대일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을 때 주로 말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 일대일 대화는 주로 직원들과의 면담이었다. 즉 내가 전달할 당부 사항이 있었기 때문에 진행된 것이고 따라서 내가 주도권을 잡고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느 정도 용인이 되는 경우이기도 했다. 그래도 좀 더 유연하고 깊은 소통을 위해서는 서로 주고 받는 대화가 진행되는 것이 좋았을 텐데 나도 비교적 일방적으로 내 이야기만 전달했던 적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러나 핑계를 대자면 사실 주로 연차가 짧은 신입들과의 면담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뻘이 되는 고직급자에게 그들이 의견을 자유롭게 낼 수 있는 상황도 아니긴 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해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는 경우는 드물었다. 물론 그중에는 의견을 낼 것을 부탁하면 활발하게 자신의 입장에서 의견을 내보이는 직원도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사람'은 자기 말만 하는 사람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남의 말을 듣긴 하지만 전혀 존중하지 않고 자기 주장만 하는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가장 심각한 사람은 대화 상대방이 의견을 충분히 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한 마디도 들은 적이 없다는 듯이 완전히 그 의견을 무시하고 자기의 말만 계속하는 경우이다. 이런 사람은 가장 최악의 대화 상대다. 특히 여러 사람을 초대해 놓고 자신의 주장만 주구장창 늘어 놓는 사람은 최악 중의 최악이다.
우리 자신은 과연 어떤 모습의 사람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나의 경우도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조금 더 해 보려고 최대한 노력은 하지만 남의 말을 끊고 들어가기가 너무 부담이 되고 어렵기도 하다. 그래서 모임에서는 주로 듣게 되는 편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비슷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 '자기말만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만 온 대기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다.
내게서 필요한 것을 충족하면 즉시 사라지는 사람이다. 필요하지 않으면 연락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최근 십 수 년 전에 연락이 완전히 끊긴 과거 회사 동료로부터 경조사 연락을 받았다. 그것도 2개월 차이로 2번이나 말이다. 첫 번째 연락을 받았을 때에도 사실 놀라웠는데 불과 2개월 후에 두 번째 연락을 받았을 때는 솔직히 '이건 뭔가'라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과거에 그와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성의를 표했지만 약간의 찜찜함이 남아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는 좋은 사람이다. 그래도 난 필요할 때만 그의 연락 받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경조사 측면에서는 나도 나중에 같은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다. 내가 많이 우려하는 바이기도 해서 혹시 경조사가 발생하면 친밀도를 세심하게 고려하여 제한적으로만 알릴 계획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과연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혹은 내게 의미가 있는 사람은 누구인지 한 번 휴대폰을 열고 훑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정기적으로 하기는 쉽지 않으니 시간이 날 때 가나다 순으로 이름을 훑어보고 그런 사람이 발견되면 안부 문자라도 보내는 것을 권한다. 그리고 이것은 실제로 내가 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렇게 해도 잘해야 1년에 한 번 정도 연락을 할까 말까이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단순히 생각이 나서 안부를 묻는 것은 인간 관계를 원활하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최소한 내가 필요할 때만 연락하는 사람이라는 오해는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단순하게 오해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하여 밑밥을 까는 수단으로 이런 연락을 하라는 말은 아니다.
이런 사람은 타인에 대한 인간적 배려나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인데, 특히 회사에서 이런 사람이 리더가 될 경우 그의 부하직원들은 정말 괴로울 수 밖에 없다. 리더가 회사에서 자신의 성과를 내기 위하여 팀원들에게 강한 업무 강도를 부과하는 것은 어느 정도 납득이 되지만 비상식적으로 너무 과한 것은 문제다. 거의 대부분 무엇이든 과유불급이기 때문이다.
특히 조직원들이 개인적인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까지 충성할 것을 요구하는 경우는 최악이다.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같은 사람이 요구하는 업무 강도는 상당히 높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테슬라는 세계 최고의 전기차 기업이다. 광적인 도전 정신이 필요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 곳이라고 하여 비정상적인 업무 강도를 부여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할 생각은 없지만 현실적으로 매우 예외적인 성과와 혁신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와 비슷한 수준의 매우 예외적인 노동강도가 필요할 가능성이 높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상응하는 보상이 있다는 전제는 필수적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보통 사람들의 일터는 테슬라는 물론 아니고 세계 최고의 혁신이 이루어지는 수준의 기업은 더더욱 아니다. 보통의 기업이라고 해서 경쟁과 혁신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테슬라나 애플 같은 극악의 업무 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런 회사들이 요구하는 극악의 업무 강도와 긴 노동 시간은 대부분 금전적 보상으로 상쇄되곤 한다. 그들이 혁신을 이루고 밤새워 일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그런데 평범한 직장인들이 다니는 보통의 회사는 획일적인 보상 수준을 벗어나는 보상을 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렇게 보상 수준은 혁신적이지 않으면서 극악의 노동 강도를 요구하는 것은 합리성을 부여받기가 대단히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회사들이 이런 현실을 망각하고 터무니 없는 노동 강도와 보상없는 초과 근무를 요구한다. 요구가 아니라 정중히 부탁해야 할 사항이다.
24시간 아무때나 연락하는 것은 기본이고 휴일에도 수시로 연락하여 업무를 지시하곤 한다. 아직 우리나라 노동 문화는 선진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경우는 여전히 많을 것이다. 조직의 리더가 그런 분위기를 강압적으로 조장한다면 그의 목적은 대부분 성과를 창출하여 본인이 인정을 받기 위함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사실 그 정도는 리더로써 원할 수 있는 내용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 경우라도 업무를 수행하는 부하직원들을 조금이라도 정서적으로 이해하려는 마음은 있어야 하는데 그런것이 전혀 보이지 않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마치 빚받으러온 채권자처럼 당당하게 휴일에 업무를 지시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들은 왜 그럴까? 내 관점에서 그들은 두려움이 많고 자신감이 떨어져서 부하직원에게 의존하려는 사람일 뿐이다. 부하직원이라도 결국 회사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다. 서로 도와줘야 하는 동료로써 상호 존중과 배려가 필요하다. 그러나 성과에 대한 과도한 욕심과 낮은 자신감 혹은 자존감으로 그게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부하 직원을 배려하려면 결국 상사의 책임 범위가 조금이라도 넓어져야만 한다. 그걸 감수하려면 용기가 필요한데, 대부분 위로 올라가면 자기 목숨부지하기 바빠서 '남' 배려할 틈은 없는 모양이다. 주말에 업무를 수행할 것을 지시한다면 그에 마땅한 보수를 지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보수를 지급하는 것이 쉽지가 않은 것이 문제다. 정당한 보수를 지급하는 일을 해 내는 사람이라면 주말에 직원들에게 일을 시켜도(정확히 말하면 '부탁해도') 자기만 아는 사람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해 내는 사람은 매우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는 나는 어떠했을까? 적어도 부하 직원의 경우 아무리 어려도 단순한 하위 직급의 사원이 아니라 회사 동료로서 대하려고 노력했다. 사실 그들이 회사 동료인 것이 명백한 사실이기도 하다. 그리고 주말에 근무를 시킬 때는 최소한의 금전적 보상을 했다. 그 보수를 받는 사원들의 입장에서는 그 돈을 받지 않고 대신 주말을 온전히 보장받는 것이 훨씬 좋았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회사의 규정에 따른 최소한의 보수는 그들에게 별로 인상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보수를 지급하기 위해서 나는 목숨을 걸어야 했다. 그런 일은 회사의 핵심 의사결정권자들이 싫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재직하는 내내 최소한의 정당한 보수를 주기 위하여 노력했지만 지나고 보니 그래도 부족했던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예전에 어떤 분이 퇴직을 하시면서 내게 한 말이 있었다. 그분도 정년 퇴직을 앞두고 회사에서 내 몰리는 형식으로 나가야 했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통상적인 위로금에 더 추가한 보상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을 했고 결과적으로 더 많은 혜택을 주고 그분과 이별할 수가 있었다. 그분이 내게 남긴말은 이랬다. '저희들 챙겨주시느라고 나중에 나가실때 대신 그 짐을 짊어지시겠네요' 라고 말이다. 웃으면서 농담으로 한 말이겠지만 나중에 결국 그 말은 현실이 되었다. 그렇지만 후회는 한 톨도 없다. 어차피 지난 일이고 난 내가 하고 싶은 일 그리고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직장에서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지만 다른 곳에서도 그런 사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보통 사람들이 접하게 되는 사람들이 거의 직장에서 관계를 맺게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직장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였지만 다른 영역에서도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은 일단 걸러야 할 것이다.
자신을 진정으로 낮춰야 비로서 높아진다는 말을 들어 봤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유독 자기 과시가 심한 사람이 있다. 자신이 거쳐온 부서에서 달성한 주요 공적은 모두 자기가 한 것처럼 이야기를 한다. 그런 사람은 '내가...'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사용하는 표현 자체부터 자기 중심적이다.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귀에서 피가날 것 같다. 특히 이런 사람들이 주요 권력을 장악하면 그가 참석하는 회의는 그가 주최자이건 참석자이건 그의 발언 시간이 절대적으로 길어진다. 그는 직원들의 소중한 시간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레기통에 처넣어 버린다. 나도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늘 이런 유형을 피하고 싶었다. 물론 늘 성공적으로 피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내 시간중 상당부분은 의미없이 소모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기를 과시하는 원인은 다양할 것이다. 그 원인으로는 자존감 부족, 두려움, 욕심, 욕망, 피해의식 등과 같은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자기를 과시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그렇게 보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애써서 먼저 자신이 스스로에게 기대하는 모습을 투영하여 타인에게 직간접적으로 그 모습을 받아 들일 것을 강요하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 해석해도 저급한 행태로 밖에는 볼 수 없을 것 같다. 자기 과시는 자신을 특별하게 보이기 위해서 복어처럼 배를 부풀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복어가 배를 부풀리는 것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없는 카리스마를 있는 것처럼 내보이려는 노력은 복어가 하는 배 부풀리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자기 과시를 하는 사람은 마치 자신이 카리스마가 있는 것처럼 보이길 원하는 것같다. 그러나 카리스마는 너무도 짙게 그 사람의 모든 세포에 녹아 있어서 자연스럽게 풍겨나오는 것이지 애써서 분출하려고 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자기 과시를 위해서 몸에 힘을 주고 배에 압력을 가하면 방귀밖에 나오지 않을 것이다. 깜냥이 되지 않는데 자기 과시하는 사람은 타인의 눈에는 그냥 방귀만 계속 뀌는 것과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른다.
자기 과시는 은연중에 드러내는 경우도 있고, 대 놓고 떠벌리는 경우도 있다. 은연중에 드러내는 경우는 최소한 상대방에 대한 배려심을 완전히 잃지는 않은 것인데 대 놓고 떠벌리면서 상대방에게 강제적으로 듣게 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과도 같다. 객관적으로 타인으로부터 공감 받지 못한 주장은 순전한 언어 폭력과도 다르지 않다. 이런 행위를 하는 사람이 만약 지금 머리속에서 떠오른다면 가급적 그런 자들과의 접촉은 최소화하길 바란다. 당신도 옮을 수 있다. 자기 과시는 전염병과도 다를바 없을 정도로 피해야 할 태도이다.
남의 말을 가로채는 사람이다. 남이 한 말의 말꼬리를 잡고 비난하고 반론하는데 재미를 느끼고 거기에서 자신의 존재감까지 느끼는 유형이다. 한 마디로 자기 혼자서 떠들어 대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소모한다. 자신의 시간을 소모할 뿐만 아니라 죄없는 타인의 소중한 시간도 같이 쓰레기통에 처넣어 버리는 것이다. 본인의 생각을 전달하기 위한 자리라면 그래도 혼자서 떠들 수 밖에 없다는 핑계가 되는데, 보고를 받는 자리 혹은 의견을 교환하는 자리에서도 계속 주절주절 자기 이야기만 한다. 결국 말이 길어지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주제에서 완전히 벗어난 엉뚱한 이야기만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밖에 없다. 다른 사람에게도 말할 기회를 줘야 한다. 이런 사람은 타인의 의견을 들을 생각 자체가 없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정말 잘 '남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사람'이라고 착각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과대 망상에 완전히 사로잡힌 것과 다르지 않다. 경증 정신병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도 이런 유형과 일한 적이 있는데 그와 어쩔 수 없이 대면할 수 밖에 없었던 몇 년은 정말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다. 그냥 '별로' 이하였다. '별로'의 사전적 의미는 '그다지 특별한 점도 없고 마음에도 들지 아니함'이다. 따라서 '별로' 이하라 하면 '정말 쓸데 없고 맘에도 너무 들지 아니함' 정도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말 문을 막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특징은 과도한 자아 존중감이다. 이미 자신만의 결론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타인과 대화를 하기 때문에 애초에 의견을 주고 받는 대화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확고한 생각을 강제로 주입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얻을 것이라고는 다시는 이런 사람과는 대화해서는 안되겠다는 교훈 뿐일 것이다.
매우 논리적으로 의견을 표현하고 상대방의 반응을 고려하면서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면 비록 아주 많은 말을 하더라도 이런 사람은 '자기 말만 하면서 타인의 말문을 막는 사람'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 말이 많다고 하여 문제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말이 많은 사람들은 괜히 뜨끔할 필요가 없다. 다만 자신의 주장과 의견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내용인지는 면밀히 스스로 엄정한 잣대를 기준으로 판단해 봐야 할 것이다.
라떼 이야기만 하는 사람이다. 옛날 이야기는 물론 재미있다. 내가 겪지 못한 다양한 에피소드에 양념을 곁들여가면서 맛깔나게 이야기를 해 주면 꽤 재미가 있다. 그런데 그건 한 두 번이면 족하다. 그런데 서 너 번도 아니고 몇 년 동안 계속 반복하여 라떼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다. 어떨 때는 설마 치매인가? 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같은 이야기를 수 없이 반복한다. 유교수의 표현을 빌자면 '입력은 고장이 났고 출력만 살아있다.' 그냥 입만 살았다는 말이다. 이런 유형은 자기 중심적 사고의 전형으로 남의 이야기를 담을 여유가 전혀 없다.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옛날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줘도 재미있게 웃어주는 사람은 초등학교 입학전의 어린 손자 손녀 밖에 없다. 아이들이 지루해 하지 않고 계속 맞장구를 치면서 웃어주는 이유를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너무 어려서 듣고도 까먹어서 같은 이야기 임에도 새로운 이야기로 들렸기 때문일 수도 있고,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같은 이야기를 매번 살짝 각색하여 재미를 더했을 수도 있다. 재미있는 과거 이야기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이야기는 이런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옛날 이야기에 한정된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 조차 너무 자주하게 되면 손자 손녀들의 맞장구도 시들해지게 마련이다.
누군가 과거 이야기만 계속 한다면 어쩔 수 없이 그의 수준을 의심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새로움이라고는 찾을 수 없고 따라서 이것은 그의 지적 수준이 낮다는 것을 의미할 가능성이 높다. 치매에 걸린 분들이 한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한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노화에 따라서 치매에 걸렸지만 결과적으로 지적 능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한 이야기를 계속 반복하는 것이다. 따라서 치매에 걸리지도 않았으면서 맨날 한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하는 사람은 지적 수준이 떨어진다고 밖에 말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들이 계속 유독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은 자기들이 그 이야기를 그토록 자주 했다는 것을 잊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런 관점이라면 슬프고 안타까운 사람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귀에 피가 나는 사람이 아니라 본인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계속 바보같은 행위를 무한반복하는 그들일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나니 사실 나도 뜨끔하다. 분명히 나도 한 이야기를 여러번 반복했던 적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한 적이 있을 것 같은 이야기인지 애매한 경우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이라는 전제를 깔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곤 한다.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아무튼 이런 경우라면 그나마 최소한의 양심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전제를 깔고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더이상 같은 이야기를 다시 반복하기도 어려워진다. 그런데 정말 문제가 되는 사람은 어떤 주문에 걸린것처럼 과거 이야기를 레퍼토리처럼 때만되면 풀어 놓는 사람이다. 절대로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유독 심한 사람을 한 명 경험한 적이 있는데 그의 경우는 정말 최악 중의 최악이었다. 귀에 피가 나도록 들어서 사실 이런 평가를 하는 것에 미안한 마음도 전혀 들지 않을 정도이다. 아마 그도 위에 내가 언급한 이유로 계속 그런 말하기 습관을 떨치지 못하는 것같다. 모든 리더가 훌륭할 수는 없다. 따라서 내가 만났던 리더가 모두 훌륭할 가능성도 없다. 내가 그런 사람을 겪은 이유일 것이다. 부끄럽지만 어쩌면 나도 조금은 그런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사람은 걱정이 많고 한탄만 하는 사람이다. 불평이 많은 사람이기도 하다. 여기서 '도전'은 큰 도전만이 아니라 작은 것이라도 도전하라는 의미이다. 문제가 생기면 해결을 모색해야 하는데 문제의 무게에 먼저 압도되어 걱정하고 불안해하고 당황만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런 유형은 주로 하급자들 같이 경력과 배움이 더 필요한 사람들이 해당될 것이다. 경험이 부족하니 아는 것도 부족하고 따라서 걱정과 두려움에 휘둘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험과 경력이 부족한 하급자들의 불안과 당황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간혹 경력이 쌓일 만큼 쌓인 관리자급 중에서도 그런 성향의 사람이 있다. 나도 그런 사람을 겪은 적이 있어서 그의 걱정과 한탄을 접할 때마다 매번 걱정하지 말고 방법을 찾으면 된다고 조언을 했고 실제로 결과적으로 문제를 모두 해결해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런 부정적 성격은 잘 고쳐지지 않았다. 아마 지금도 걱정할 필요 없는 일에 대하여 걱정 중이지 않을까 한다. 물론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안타깝긴 하다.
현실에 안주하고 도전하지 않는 사람은 그래도 최악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유형들은 주로 타인에게 피해를 많이 주지만 이런 유형은 타인에게 피해를 심하게 주기 보다는 스스로 자기만 무너지는 경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스로 무너지는 사람도 좋은 유형은 아니기 때문에 가까이 할 이유는 없지만 다행인 것은 이들이 먼저 다가와서 적극적으로 피해를 주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러나 이런 유형이 혹시라도 리더가 될 경우에는 타인에게 피해를 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유형이 어떻게 리더가 되나? 라는 의문이 있을 수 있는데 이런 사람이 리더가 되는 경우도 충분히 가능하다. 당신이 알고 있는 주변 사람들 중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올라간 사람들 열 명을 꼽아보라. 그리고 그들 중에 현실에 안주하고 도전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지 골라보라. 최소한 몇 명은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조직의 리더는 오로지 좋은 성품과 높은 업무 능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경험한 가장 최악 중의 최악은 책을 멀리 하는 사람이 아니라 책을 가까이 하려는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책을 많이 본다는 것을 알고 모 인사가 어느날 내게 와서 '책 볼 시간이 있으면 업무에 집중하라'는 최고 경영자의 이야기가 있었다는 말을 전해 듣고 경악을 했었다. 그는 내게 책상에서 책을 치우라고까지 이야기했었다. 물론 나를 위해서 한 말이었기 때문에 그는 일단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도 당시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어이없는 심정이 동일하게 느껴진다. 한 마디로 그냥 경악을 했었다. 물론 난 그의 조언을 듣지 않았다. 그후 보란듯이 책 거치대까지 가져다 놓고 책을 쌓아놓고 봤다.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우리는 제한적 경험을 할 수 밖에 없고 따라서 지속적 역량 향상을 위하여 지식을 습득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지식의 습득 방법이 바로 독서이다. 그래야 문제 해결력도 강화할 수 있다. 지식과 지성이 늘어나면 다양한 상황에 대한 이해력이 증가하고 그에 따라서 문제 해결력이 올라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서는 일반 사원은 물론이고 중간 관리자나 리더들에게는 반드시 권장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책을 스스로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서 가까이 하려는 사람을 싫어하는 리더는 도대체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반면 내가 존경했던 또 다른 리더는 오히려 업무를 빨리 끝내서 시간 여유가 있으면 책을 보라고 권했었다. 그로 인하여 입사 초기에 독서 습관을 갖게 된 면도 있어서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렇게 훌륭한 리더와 그렇지 못한 "야매"리더의 차이는 정말 어마어마하다. 그리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좋지 않은 면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또 다른 좋지 않은 면을 함께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자기 말만 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남의 의견을 듣지도 않고 허구헌날 옛날 이야기만 하면서 자기 과시를 한다. 이런 사람은 어쩌면 책도 잘 읽지 않을지도 모른다.
단점 보다는 장점에 집중하여 그것을 강화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사실 단점은 잘 고쳐지지 않는다. 고쳐보려고 노력을 해도 잘 고쳐지지 않아서 단점으로 남은 것 아닌가? 그래서 리더는 부하직원의 단점을 지적하기 보다는 장점에 집중하도록 하고, 단점에 대해서는 별도로 도움을 줘서 보완해 주는 것이 좋다. 비난하고 트집을 잡을 것이 아니라 도와줘야 하는 영역이 바로 타인의 단점이다.
정 단점을 지적하고 싶으면 그 전에 장점을 먼저 최소한 5가지 이야기해 줘라. 그렇게 장점만 찾다 보면 단점이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것이고, 단점을 이야기할 때도 기분 나쁘지 않게 표현할 아이디어가 떠오를 것이다. 만약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안하는 것이 좋다. 즉 단점은 그냥 말하지 않는 것이 맞다. 본인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 이미 자신의 단점에 대하여 잘 느끼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굳이 그걸 상기시켜줄 필요는 없다. 아픈 곳을 찌르면 더 아플 뿐이다. 아픈 곳은 찔러야 할 곳이 아니라 보듬고 덮어줘야 할 곳이다.
정확하게 단점만 지적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을 직접적으로 겪은 적이 있었다. 그는 공개적으로 '나는 칭찬을 하지 않습니다. 칭찬은 사람을 오만하게 만듭니다. 부족한 점에 대하여 지적해야 개선이되고 서로 발전이 됩니다' 라고까지 이야기를 해서 모든 듣는 이들을 놀라게 했다. 그가 너무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명백한 단점이었지만, 그가 가진 나머지 장점을 보도록 노력했고, 그의 그런 치명적 단점은 반면교사로 삼았다.
받은 도움을 까맣게 잊는 사람이다. 필요할 때 도움을 받고 연락을 끊어 버리는 경우이다. 인간은 혼자서 생을 살아갈 수 없는데 그는 혼자서 자기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당연한 말이지만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 다 연결되어 있다. 꼭 나중에 어떤 관계가 될지 모르니 그걸 대비하여 잘 처신하라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받았으면 그걸 기억하고 감사해하고 언젠가 기회가 되면 갚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늘 받아만 오던 사람은 남의 도움을 당연히 자신이 누려야 할 권리로 여기는 듯한 생각도 든다. 그러니 감사함을 모르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오히려 자기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여긴 사람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못하면 오히려 원망하고 비난을 할지도 모른다. 내 주변인들은 감사함을 잊지 않는 좋은 인성의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동료나 후배 중에서는 그런 사람을 아직 겪지 못했다. 너무 감사하게도 말이다.
물론 예외(일부 상급자)는 있었다. 개인 시간까지 할애하여 온갖 추가 업무를 지원해도 고마움은 커녕 오히려 트집을 잡으면서 비난을 하곤 했다. 물론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사람 역시 반면교사의 대상일 뿐이었다.
당신은 몇 가지가 해당되는가?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스승으로 삼으라고 유교수는 말했다. 위에 언급했듯이 나는 그런 관점에서 꽤 많은 스승이 있었다. 이걸 행운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지만, 아무튼 일단 내게 이미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현실을 받아 들이고 그 속에서 최선을 찾는 것이 좋겠다. 어찌 되었든 스승을 갖게 되었으니 말이다.
유교수는 이 영상을 통하여 인간 관계에 대한 깊은 통찰을 알기쉽게 설명해 줬다. 그리고 대부분 내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내용이라서 기쁘기도 했고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유교수가 말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사람'은 겸손한 사람 그리고 약간 손해를 감수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만나려고 노력하고 우리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 관계에서는 약간 손해를 보는 것이 좋다는 말인데, 이것은 내가 재직시 늘 사원들에게 했던 말과 정확히 일치한다. 만원을 둘이 나눠 가지라고 하면 당신이 4900원 갖고 상대방에게 5100원을 주라는 이야기이다. 더 큰 양보를 하면 더 좋다. 결론은 아주 조금이라도 내가 손해를 보는 것이 건설적인 인간 관계를 수립하는데 매우 요긴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에게 지속적으로 손해를 끼치기만 하는 사람과는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까? 유교수는 단정적으로 이야기했다 '계속 손해를 주는 사람은 끊어라' 라고. 나도 최근에 끊었는데 유교수의 조언을 제때에 실행한 모양이다. 아주 시원하다! 시원섭섭한 것이 아니라 그냥 시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