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씨 Jul 16. 2024

MZ며느리의 공황장애 극복기

결혼은 둘만 좋아서 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올해 33살, 22년 11월에 결혼한 7년 차 직장인이자 2년 차 새댁이다.

남편은 고등학교 친한 친구의 소개로 만나게 되었으며 연애 1년 차에 결혼준비를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 아빠는 내가 태어나고 18년 동안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주 6일 10시간 이상 운전직으로 근무하셨고

우리 엄마는 종갓집 맏며느리, 기가 너무 센 고모 둘의 시집살이, 8년간 운영한 식당, 자녀 2명을 돌보며 생활하셨다.

그걸 보고 자란 K-장녀인 나는 20살 이후로는 무조건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덕분에 나는 남들보다 조금 더 부모님에게서 일찍 정서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독립했던 것 같다.

유년시절 그렇게 바삐 살았어도 우리 집은 늘 화목했다.

휴가철이면 무조건 바다로 계곡으로 산으로 로드트립을 다녔고

덕분에 여자치고 아무 데서나 잘 먹고 잘 자고 두려운 것 없이 무엇이든 도전하는 여성으로 자란 것 같다.

그래서 결혼관도 확고했다. '내 결혼은 내가 벌어서 부모님 도움 없이 시작하자'라는 생각이 확고했던 것 같다.


우리는 다른 예비부부들과 달리 결혼준비로 싸울 일이 별로 없었다.

성격도 성향도 그렇지만 전적으로 서로 믿고 의지했기 때문에 서로의 의견을 존중했다.

그리고 결혼 전 약속한 한 가지, 무엇이든 우리의 힘으로 해내자.

양가 도움은 받지 않기로 하고 시작했다.

둘이 모아놓은 돈은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둘이 함께 시작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남편을 우리 집에 처음 인사시켰던 장어집에서 우리 부모님의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대뜸 "엄마 아빠, 나 결혼하고 싶은 사람 생겼어. 다음 주에 인사시킬게!"라고 얘기했더니 이틀 동안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잠을 지새운 우리 아빠.


경제적으로 편하게 살도록 도움을 못주는 것에 대해 부모님은 속상해하셨지만 내 가치관으로는 이해가 안 되었다.

부모님 두 분 모두 나와 내 동생을 건실하게 잘 키우셨고 건강하셔서 아직 두 분 다 일을 하실 수 있고 노후대책도 하고 계시는데 왜 도대체 자녀 결혼에 몇천만 원씩 지원을 못해줘서 속상해하시는지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이런 가치관을 갖고 있는 만큼 남편도 내 생각에 동의했지만

1년 차이로 결혼하는 형의 결혼에 수천만 원 지원을 한 시댁에서는 형제가 1년 텀으로 결혼하는 게 부담스러우셨던 것 같았다.


나는 남편에게 지원은 전혀 필요 없으니 우리끼리 모은 걸로 시작하자고 제안했고 남편은 그런 마음을 고마워했다.

그렇게 지방에 메이저 웨딩홀이 아닌 평범한 웨딩홀에 스드메를 예약했고, 우리는 1000/55만원짜리 직장 근처 20년 된 구축아파트 월세로 신혼집을 구했다.


이후

첫인사는 시댁 근처 한우집.

아버님 어머님은 인사만 받으시고 말씀한마디 없이 고기만 드셨다.

심지어 어머님은 소고기를 못 드신다고 하셨는데 한우집에서 만난 게 의아했다.

돌아오는 길에 남편에게 "어머님 고기 안 드시면 다른 식당으로 예약을 해야지, 그리고 내가 마음에 안 드셔서 말씀을 안 하시는 거야?"라고 물었지만 그런 건 아니라고 했다.

왠지 찜찜했다.


두 번째 만남은 명절 전날,

당시 시댁에는 결혼준비 중인 남편의 형(아주버님)을 만나 뵐 수 있게 되었고 어머님과 넷이 함께 시댁 근처 카페에 갔다.

아주버님은 나에게 결혼준비 관련하여 이것저것 물으시더니 "돈도 없는데 무슨 스튜디오 사진을 찍냐"라고

어머님한테 얘기하는걸 내 귀로 똑똑히 들었다.

그 얘길 듣고 남편에게 얘기했으나 어머님과 아주버님은 절대로 그런 얘길 한 적이 없다고 하셨다고 한다.

그냥 내가 잘못 들었나 보다 하고 넘겨야 되나 했다.



비록 자가는 아니지만 언젠간 청약이 될 거라고 생각하며

나 혼자 자취하던 오피스텔을 정리하고 신혼집으로 먼저 입주했다.


신혼가구 비용이 만만치 않지만 너무 비싸지도 저렴하지도 않은 제품으로 하나씩 들이는 재미가 있었고

그 와중에 우리는 너무 운 좋게 신도시 신혼희망타운에 당첨되었다.

당첨자 발표날 회사에서 확인하고 나는 우리 부모님께 바로 전화를 걸었고 너무 잘되었다는 축하를 받았다.


근데 시댁은 좀 달랐다. 첫마디가 "너네 돈도 없는데 어떻게 하니.."였다.

우리는 서류 접수할 때 자금계획까지 모두 세우고 접수한 것이었고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는데 축하보다는 걱정이 앞서는 말을 먼저 들었을 때 내심 서운했으나 그냥 정말 걱정이 되셔서 그런가 보다 했다.


당첨이 되고 계약금을 입금해야 해서 서류 제출을 하려고 여러 서류를 떼는데 남편 표정이 좋지 않았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시댁에서는 아주버님 결혼할 때 친척들한테 돈을 빌리셔서 수도권 아파트 보증금을 해주셨다고 한다.

거기에 아주버님의 와이프(형님)가 운동센터를 하시는데 인테리어비로 돈을 빌려주신 것인지 밑천을 해주셨다고 했다.

거기까진 괜찮았는데 알고 보니 '남편이름으로 대출'을 받아서 형님 사업자금으로 빌려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남편이 당시 모아놓은 돈이 많았던 것도, 수입이 많은 것도 아니었는데 왜....

형님은 결혼과 동시에 현금으로 차를 샀고, 대학원에도 입학했고, 센터도 오픈했다.

동생이 결혼준비 하는 걸 알면서 대출받아달라고 하는 태도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당장 대출금 회수해오지 않으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고 다행히 빌려준 돈은 받았다.

그리고 "앞으로 이런 일이 있으면 절대 오빠랑 못살아"라고 못을 박았고 우리는 다행히 계약금과 중도금을 대출 없이 낼 수 있었다.


시댁의 분위기는 우리 집과는 너무 달랐다.

만나도 말이 없는 분위기, 표현을 아예 하지 않는 분위기, 나에게 궁금하신 것도 없어 보였다.

아주버님은 나에게 관심이 많아 보여서 이것저것 물었으나 형님은 내가 인사를 해도 대답도 안 하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왜 그러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드디어 대망의 결혼식날, 무사히 결혼식은 마칠 수 있었으나 여전히 형님은 결혼식 당일에도 나에게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 없이 밥만 먹고 갔다.

그냥 내가 마음에 안 드나 보다 했지만 ESFP인 내 성격상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도 돈문제 때문에 사실 감정이 좋지 않았지만 친해지려고 노력했지만 영문도 모른 채 그런 대접을 받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나의 극한의 스트레스는 결혼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keyword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