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행 에세이: 이탈리아 돌로미티
풀밭은 거기, 오두막집들은 거기, 바위산은 또 거기... 한줄기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풀잎은 노오랗게 휘어지며 가을로 일렁인다.
알프스 자락에서 가을을 바라본다.
나는 걸으며 경박한 사유를 한다
걸으며 '사유'를 한다는 이상(理想)은 내게는 사치임에 틀림없다.
아주 오래전 '체념'을 찾아 지리산을 걸었다. "수고하십니다." 마주 오는 낯선 이들의 정겨운 인사말이 상처를 덧나게 했다. 한나절이 못되어 도로 서울행을 결심하였다. 그 후로도, 사유(思惟)가 필요했던 걷기는 늘 '소풍'으로 끝이 났다. 덕분에 (대개는 갈 곳과 할 것이 미리 정해진) 걷기는 편해졌다. 환한 대낮에 '이불킥'을 떠올릴 경박한 잡념 따위나 '아, 좋다!' 정도의 깃털처럼 가벼운 사유로도 걷길 잘했다 싶었다.
용혜원 시인이 <어느 날 하루는 여행을>에서 일러준 비법을 따라 하고 싶었다. 쉬워 보이지만, 내게는 너무 어려운 일...
어느 날 하루는
여행을 떠나
발길 닿는 대로 가야겠습니다.
그 날은 누구를 꼭 만나거나
무슨 일을 해야 한다는
마음의 짐을 지지 않아서 좋을 것입니다.
알프스가 그리운 이유
융프라우 산악열차 차창에 그림이 펼쳐졌어도, 비현실적 순백의 절경을 보았어도... 늦은 오후 라우터브루넨(Lauterbrunnen) 어느 테라스 주점의 맥주 몇 잔과 슈타우프바흐 폭포를 찾아 걷는 내 곁을 무심히 지나치는 소떼의 쩔렁쩔렁 방울소리를 가장 잊지 못한다.
며칠째 머물고 있는 10월 중순의 밀라노는, 비가 내리면, 낮이나 밤이나 을씨년스럽다. 이탈리아로 내리 뻗은 돌로미티(돌로미테) 알프스는 다음 달이면 눈 때문에 닫히는 길들이 생겨날 것이다. 겨울이 가까이 왔다.
알타비아 종주, 내겐 어림없다
돌로미티는 알타비아(높은길) 종주 트레킹이 제멋이긴 하다. 하지만, 열흘 정도의 시간과 여러 날 트레킹을 버텨야 하는 인내력(체력)이 나를 막아선다.
알프스를 호젓하게 바라볼 수만 있다면 '한나절도 내겐 족해.'라고 마음을 다잡는다. (지루하기만 한) 밀라노 체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하겠기에, 어느 토요일, 동이 트기 전 돌로미티로 떠난다.
밀라노는 돌로미티의 서쪽을 허락한다. 베네치아에서 출발하면 동쪽이겠다.
베르가모, 베로나를 스쳐지나 볼차노(Bolzano)에 이른다. ‘길’을 일러주는 이정표가 Strada(이탈리아어)와 Straße(독어)를 붙여쓰기 시작한다. 어느새 독일풍이다. (예전에는 오스트리아 땅 남(南)티롤이었다.)
가을의 돌로미티에서 지난 어느 여름날의 들꽃 가득 피어난 티롤 알프스 산골마을을 추억한다.
밀라노를 떠난 지 네 시간. 산맥 깊숙이 오르티세이(Ortisei)에 이른다. (중간 휴게소에서는, 한 손에 카푸치노를 든 채, 할인판매하는 롬바르디아 와인, 베네치아 와인에서 한참을 눈을 떼지 못하였다.)
이제 오르티세이에서 더 갈 곳을 모른다.
세체다 또는 알페디시우시
세체다(Seceda)로 가려거든 북쪽 곤돌라, 알페디시우시(Alpe di Siusi)를 오르려면 남쪽 곤돌라다. 갈래길과 같다.
가을이니까. 장엄함 보다는 목가적 풍경을 위해 알페디시우시로 가야겠다. 어떤 선택이 나았을지는 영영 궁금해하지 않기로 한다.
"방황하는 영혼이라고 해서 모두 길을 잃은 것이 아니다. 인생에는 미처 다 가볼 수 없는 여러 갈래길이 있다. 그 여러 갈래길 사이에서 잠시 이탈하거나 행로를 변경하는 것은 방황이 아니라 오히려 행복한 모험일 수 있다."
(고든 리빙스턴 '너무 일찍 나이 들어버린 너무 늦게 깨달아 버린' 중에서)
곤돌라 탑승장에 다다라 상행 티켓 한 장을 구입한다. (티켓 부스 청년이 왕복이 아닌지 재차 묻는다.) 매혹적인 빨간색 곤돌라에 올라탄다.
하늘 높이 위태롭게 걸린 로프의 끝 닿는 곳에서 행복한 모험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걷는 길 위로 시(詩)가 적혔다
위로, 계속해서 위로, 가파르게 오른 곤돌라에서 깡충 뛰어내린다. 별 다를 것 없는 승강장을 서둘러 빠져나온다.
알페디시우시가 거기. 첫 만남이 거기다.
3천 미터 고봉에서 1천 미터를 순식간에 미끄러진 바람이 유럽 제일의 플라토(Plateau) 드넓은 풀밭 위를 훑으며 난다 싶더니... 알프스가 낯설지 않다는 시건방진 이의 머리카락이 헝클어진다.
풀잎들이 눕는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얕은 신음이 들려온다.
알프스의 품속이 거기.
두터운 먹구름은 암(暗)을 드리우고, 그 사이를 뚫은 햇살은 명(明)을 만든다. '암'이 '명'이 되더니, '명'은 어느새 '암'이 되어 빗방울을 흘린다.
그 모든 것들이 '가을'을 만들어 알프스 품속을 걸어가는 무심한 여행자를 따라서 가만가만 걷는다.
더욱더 느리게 걷는다. 앞서 걸어가는 이들과 거리를 벌인다.
"내면을 들여다보라."
"본질을 보라."
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사유하리라.' 마음을 다잡건만, 내가 걷는 길 위로 시(詩)가 적혔다. 흙길을 걷든, 풀길을 걷든, 아스팔트 덧바른 길을 걷든 매나 마찬가지다.
가을볕에 넓은 들판이 노오랗게 익어온다. 백 년 전 예이츠의 가을이나... 내가 걷는 알프스의 지금 가을이나 매나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긴 나뭇잎 위로 가을이 당도했습니다.
그리고 보릿단 속 생쥐에게도
머리 위 마가목은 누르슴히 물들고
이슬 젖은 산딸기 잎도 노랗게 물들었습니다.
(윌리엄 예이츠 '낙엽' 중에서. 장영희 번역시)
10월 하순 알프스 산골에는 이미 겨울이 가까웁고, 흐렸다 개었다 변덕이 죽 끓는 날씨에도 하이킹만큼은 꼿꼿하다.
가을볕에 (아무도 모르게) 익어오는 발그레한 볼은 '이불킥'이 필요할 잡념을 쫓아 버리고, "아, 좋다!" 감탄은 너무 식상하다.
사쏘 룽고 우뚝 솟다
겨울이 오면 알프스에 안긴 이곳 산골마을은, 피레네에 안긴 안도라처럼, 온전히 순백의 스키장이 될 터이다.
노르딕 스키를 타고 미끄러져야 할 길 위에서 한 대의 마차와 마주친다. 따각따각 말발굽 소리가 멀어져 가며 소란스러운 중국어 대화도 빠르게 멀어져 간다. 아마도 가을의 알프스에 어울리는 선문답을 하리라.
그 길을 거슬러 걷기를 계속하여 사쏘 룽고(3,181m)에 가까워진다.
왼쪽은 사쏘 룽고, 오른쪽은 사쏘 피아토(2,956m). 천년 전이나 이 계절이나 거대한 백운암(돌로미티) 바위산은 매나 마찬가지일 터.
압도당한 채, 불어오는 바람이 실어오는 축축한 풀냄새에 폐부를 한껏 열어젖힌다. 가을을 들이마신다.
갈곳 없이 걷는 길의 끝자락에서, 길 잃은 사막의 오아시스를 발견하듯이, 산장을 만난다. 말가 사농(Malga Sanon)이라는 멋스러운 이름을 가졌다. 걷는 자에게 내리는 은총과 같다.
사쏘 룽고 '거대한 바위'는 산장 앞에서 더욱더 위압적이다.
맥주 한 잔, 연이어 레드와인 하프 리터(Half Liter)를 마신다. 압도당한 채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니, 와인 잔은 본능적으로 입을 찾는다. 겨울이면 스키 선수라는 서빙하는 아가씨와의 한담마저 나를 편히 쉬게 한다.
와인은 거들뿐, 모든 건 들판과 바위산과 산장 오두막과 바람이 다 한다. 사쏘 룽고는 와인 잔에 뚜렷하게 담겼고, 바위산 아래 맑은 호수는 뉘엿뉘엿 져가는 가을볕에 붉~게 익어 올랐다.
세상 시름 다 잊고 이탈리아 알프스 깊숙이 몸을 뉘었다. 나는 걸으며 세상 가벼운 사유를 한다. 경박하다고 한들 뭐가 대수일까.
오르티세이로 걸어 내려오며 질척하게 비를 맞는다. 어느새 저녁이다. 밀라노까지 돌아갈 길이 멀기만 하다.
에필로그
돌로미티 동쪽은 코르티나 담페초가 거점 도시다. (1959년 동계 올림픽이 열린 곳이자, 2026년 밀라노-코르티나(Milano-Cortina) 동계 올림픽 개최 예정지)
실베스터 스탤론 주연의 클리프행어(1993) 주촬영지가 코르티나 담페초 인근의 Tofane 절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