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행 에세이: 모로코 마라케시
"마라케시는 말이지 꼭 가봐야 할 데야." 수도 라바트와 카사블랑카만을 오갔던 ('미생'의 장그래와 같았을) 내게 그룹 회장님이 좋아라 한 마라케시는 (지척에 두고도) '동경'으로 남았다. 옛날 옛적에.
그 회사와도 모로코와도 더는 연이 없던 어느 해 무더운 여름날, 꿈을 이루려 마라케시로 향했다. 혼자가 넷이 된 세월이 흘렀다.
짙(짓)붉은 마라케시
레반트('해뜨는 동쪽' 나라들: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풍경은 모래 빛깔이 우세한 '황:적색'이라면, '해지는 서쪽' 마그레브 땅의 모로코는 짓이겨진 붉은색이 압도한다. 바로 '알함라(알함브라)' 색이다.
라이언에어 항공기가 마라케시 공항 활주로에 내려앉기도 전에 창너머 불타오르는 붉은색을 목격한 큰 아이가 첫인상을 직관적 외마디로 내뱉는다. "헐!" 동생이 따라 한다. "헐!" 거의 동시에 정시 도착을 자축하는 팡파르가 기내에 울려 퍼진다.
"마라케시는 내게 색을 가르쳤다." (이브 생 로랑)
마라케시를 바라보는 시선
'그래, 역시 이렇군.' 본능적 반응은 나라고 다르지 않다. 다만, 붉은 점토의 원초적 색채 위에 이 도시를 부르주아적으로 향유해 볼 설렘을 푸른빛 보색으로 칠하고, 또 흙냄새, 땀냄새 진동할 사람 사는 모습을 체험(구경)할 기대를 얹어 붉으죽죽하게 덧칠을 해본다.
알라딘(2019) 영화 속 지니의 노래에서 '아라비안 나이트'를 꿈꾸는 보통의 시선(동경)을 찾는다.
Where the caravan camels roam
캐러밴 낙타들이 돌아다니는 곳
Where you wander among every culture and tongue
온 세상 문화와 언어 사이에서 헤매 다니는 곳
It's chaotic, but, hey, it's home
혼란스럽지만, 그래도 편안한 곳
언제 읽어보았는지... '아라비안 나이트'를 무작정 추억하게 한다. 셰에라자드의 이야기를 밤새워 다시 읽으라면, (가장 많은 이야기를 품은 이라크 바그다드도 아닌, 신밧드가 바다로 나간 이라크 바스라도 아닌) 나는 이곳 마라케시에서 미드나잇 오일을 켜리라.
불과 서너 해 전이다. 바그다드의 밤은 간간이 들려오는 포성으로 잠 못 이루고, 50도 뜨거운 바스라의 모래바람은 이라크항공 탑승 트랩을 오르는 내 등을 마구 때렸다.
박노해 시인은 티그리스 강 흑백사진 한 장을 놓고 바그다드 인상을 나보다 더 지독하게 그렸다.
"미군의 헬기소리는 울려오는데, 티그리스 강의 아이들은 재생再生의 몸부림인 듯, 버려진 사담 후세인의 전함 위에서 강물로 뛰어든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환상과는 멀고도 멀다.
마라케시 공항 입국 수속장은 사람들로 미어터진다. 무척이나 덥다. 더디다. 복장 터진다.
애들 눈에는 저게 어찌 택시일까 싶다. 덜덜 거리며 호텔로 향한다. 그 길가 메마른 대지와 창백한 붉은 집들과 꼬질꼬질한 또래들 모습에 또 한 번 충격적 "헐!"을 내뱉는다. 택시 기사가 부르는 바가지요금도 따지면 무엇하랴. 그런 것이지.
천년고도, 지독한 중세의 유산
베르베르어로 '신의 땅'. 마라케시는 11세기 에스파냐 안달루시아에서 세네갈 강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통치하던 알무라비트 왕조의 수도였다. 천년 세월의 흔적만 남은 게 아니다. 외지인들은 중세의 유산이 어떻게 현대의 사람들에 발현하였는지 궁금하다. 아라비안 나이트 환상의 발현이다.
호텔에 도착한다. 허허로운 사막 위 별천지다.
한때 모로코풍 가구와 인테리어가 우리나라 부유층의 유행이었다. 오리지널이 우리를 맞는다.
대담한 붉은 바탕색 위로 현란한 타일 모자이크와 어질어질한 아치가 어우러져 눈 닿는 데마다 예술 작품이다. 게다가 오리지널이다.
영롱한 별이 다섯 개지만, 그래도 '부르주아' 등급에 턱걸이할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하룻밤에 백만 원 하는 몇몇 호텔들은 아라비안 나이트를 애써 연출한다. 촛불, 꽃, 전통의상 남자들의 도열로 장식한 야외 수영장, 벤디르 드러머, 뱀 부리는 마술사, 불 먹는 차력사, 믹솔로지스트 칵테일 그리고 프랑스 요리.
마라케시의 탁월한 부르주아 웰니스다.
어떤 영혼은 또, 배낭 메고, 사람들과 부대끼고자 (가난해 보이는 삶의 모습에서 인간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하고자) 이 도시를 찾는다. 마라케시를 어떻게 발견하느냐는 순전히 개인적인 욕구의 일부이다.
부르주아 같은 마라케시 놀음
호텔 방에 짐을 풀자마자 수영장으로 달려간다.
수영하다 드러눕고, 그러다가 마실 것 가져달라 하고, 그러다가 배고프면 그곳이 또 테라스 레스토랑이다.
푸른 계열 물빛은 붉은색의 보색이자 부르주아 색이다. 토파즈처럼 빛나다가도 사파이어 빛깔의 윤슬로 충만하다. (이브 생 로랑의 마조렐 정원, 그곳의 압도적인 색 또한 파란색이다.)
(하루살이 마냥 살지라도) 세상살이 참 편하다.
우리가 마라케시를 발견하는 방법은 매우 부르주아적으로 시작된다.
메디나 노스탤지어
호텔에서 알선해 준 가이드를 따라나선다. 한낮의 기온이 36도까지 오른다.
환상 위를 나는 양탄자가 낮은 데로 임하듯 혼돈의 메디나(옛 시가지)로 내려앉는 기분이다. 둘러싼 성벽도, 우뚝 솟은 모스크도, 미로 같은 좁은 길, 다닥다닥 붙은 집들도 온통 붉은색을 띤다. 생생한 역사다.
"도시는 음산했고, 사람들은 가난하고 초라했다."
'모로코의 낙타와 성자'를 쓴 노벨상 수상작가 엘리아스 카네티의 소회(인상)다. 가장 신기한 구경거리는 이를 보고 어리둥절해하는 자기 자신이었다고 했다.
외지인들이 이 도시를 찾을 때는 (엘리아스 카네티의 인상과도 같을) 고정관념 같은 피상적 기대를 품고 있으리라.
내부에서 느끼던 밑바닥 생의 밀도와 그 끈적한 온기가 눈앞에 펼쳐진 느낌을 받으며 서 있는다.
'모로코의 낙타와 성자' 속 눈먼 걸인은 구걸한 동전을 입속에 먼저 넣었다. 동전을 주고 간 사람의 친밀함을 천천히 음미한 후에야 주머니로 옮겨 넣었다. 성자의 모습으로 보였다.
가이드가 물끄러미 그 광경을 바라본다.
골목이나 광장이나 돈 달라는 사람들은 당당하다. 그들의 은밀한 자부심이다.
연신 방귀를 뀌어대는 가이드를 따라서 수크(시장)로 들어선다. 듣던 대로 미로다. 역겨운 시궁창 냄새를 도처에서 맡는다.
길을 잃으면 낭패다. 가이드 뒤에 바짝 붙는다.
호텔에서 알선해 준 가이드도 다를 바가 없다. 향신료 가게, 카펫 가게, 가죽 가게...
약초 조금, 벽걸이 카펫 하나를 구입하고서 수크를 벗어난다.
걸인이 성자가 되듯이, 익숙지 않은 광경을 보며, 인생이 주는 맛이 서로 다를 수 있고, 절망의 본질이 서로 다를 수 있음을 생각한다. 어디까지 볼 것인가는 지극히 개인적인 선택이다.
프랑스 식민시대는 메디나의 미로 골목을 무정부 저항으로 여겼다. 은밀한 곳에서 사람들은 더 끈끈하게 응집하였으리라.
너, 나의 옛 도시, 나는 영원토록 너를 보리라.
오랜 세월 폭풍의 먼지는
너의 집 발코니를 뒤덮고 페인트칠 색채를 뒤덮고
슬픔의 노래를 반복하여 새긴 붉은 점토에 옷을 입힌다.
(모하메드 베니스 'Scenes of the City' 중에서)
메디나 깊숙한 곳은 혼란스럽고 피곤하다. 하지만, 더 불편하고 더 더러웠던 때를 (메디나의 정통성을) 그리워하는 시선도 있음을 알게 된다. 마법 같은 존재다.
제마 엘프나
우뚝 솟은 쿠투비아 모스크 첨탑은 메디나의 등대이고, 바로 앞에 제마 엘프나 광장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흥미롭다는 광장엔 매혹과 위태로움이 함께 있다.
누구는 실망하여 기대했던 것과 다르다고 하고, 누구는 격찬을 한다. 개탄과 격찬 그 중간의 무엇과 같은 곳이다.
낮엔 신선한 오렌지 주스가 맛나다. 시간이 흐르면서 소음에 가까운 음악소리가 퍼지고, 뱀을 부리고, 불을 뿜고, 난전이 열리기 시작하면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곳이다. 돈 달라는 사람, (누군지는 모르지만) 소매치기...
('장사천재 백사장'이던가, 이곳 광장 야시장에서 한식을 팔던 장사천재 백종원 씨는 진실이야 어떻든 논란만 남기고 자리를 떠야 했다.)
뜨거운 날 더 뜨거운 열기로 아이들이 지쳐간다. 나도 지쳐간다.
마라케시 민속공연
호텔로 픽업 온 차를 타고 삼십 여분을 이동한다. 아랍 궁전같이 꾸며놓은 곳, 판타지아 셰 알리(Fantasia Chez Ali)에서 마라케시의 밤을 보내기로 한다.
쿠스쿠스를 먹는다.
벤디르 악기를 손가락으로 손바닥으로 두드려 연주하며 흉내 내지 못할 고음의 스캣송을 부른다.
말 탄 베르베르 전사들이 위풍당당 행진을 한다.
낙타 등에 올라 호젓한 산책을 누린다.
그렇게 마라케시의 밤이 깊어간다.
마라케시 프롬나드
신(新) 아라비안 나이트 신비한 이야기 한 장면에 우리가 등장한다.
뜨거운 여름날 마라케시 메디나 골목길 짙붉은 알함브라색 속으로 땀에 흠뻑 젖어 걸어간다. 골목길 한편에 쪼그려 앉은 눈먼 걸인에게 동전 한 닢을 건넨다. 걸인이 성자처럼 보인다. 이제 모든 게 괜찮다. 왜냐면 잠시후면 우리는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별 다섯 호텔로 날아갈 것이니까.
마라케시의 우아한 산책길(프롬나드)이다.
이제, 미드나잇 오일을 끄고 책을 덮는다.
못다 한 이야기
사디안 묘지, 바히아 궁전, 코란 학교, 마조렐 가든...
메디나 성벽 안쪽이든 바깥쪽이든 메라케시의 붉은색, 파란색, 노란색, 그리고, 영롱한 모자이크와 우아한 아치를 두 눈 가득 담기 위해서 반드시 들러보아야 할 곳들이다.
다만, 뜨거움의 절정인 계절은 가급적 피하자. 아니면, 아이들 얼굴 표정과 몸짓은 시나브로 변해갈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