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맞으며
이라크 바스라 섭씨 50도 가까운 폭염도 잘도 참던 시절도 있었건만, 연일 계속되는 후텁지근한 무더위 속에 올동말동 늦어지는 가을이 참으로 야속한 요즘이었다. 이제 그만 계절이 바뀌어야 할 때임을 어찌 그리 잘도 알고 며칠 전부터 뒷산 산책길에 꽃무릇 꽃대가 이곳저곳 올라선 게 보이더니... 오늘 아침 제법 선선해졌다 싶으니 아니나 다를까 진홍색 꽃을 활짝 피운 놈들이 더러 보인다.
9월에 접어들고 이제 곧 가을이겠거니 했건만 한 달의 절반이 지나도록 무덥기만 하였다. 새벽에 큰비 듣는 소리를 잠결에 듣고서 오늘 아침은 좀 다를까 싶은 기대로 아파트 출입문 밖을 나선다. 화단의 두 그루 계수나무를 쓰다듬었는지 달고나 냄새를 풍기는 바람이 얼굴을 간질인다. 제법 선선하다.
여태껏 가을은 언제나 급행열차처럼 중간 정차도 소홀히 한 채 황급히 지나가 버렸었다. 그래도 아무 상관없었다. 가을엔 늘 두 계절쯤을 앞서서 지금보다 훨씬 나은 내년을 기약하곤 했었다.
그런데, 요즘은 뭔가 다르다. 가을이 천천히 지났으면 좋겠다. 여태껏 지나온 시간은 너무도 빤한데 비해 앞에 놓인 시간은 그저 막연할 뿐이다.
"승객 여러분께 열차 운행 지연에 관한 안내 말씀 드립니다. 이 열차는 폭설로 인해 정시보다 지연 운행되고 있으며 당역에서 잠시 더 정차할 예정이오니 승객 여러분께서는 안전한 객실 내에서..." 이 가을은 폭설이라도 내려 운행 지연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이번 가을은 어느 정도의 속도로 살아가면 좋을까.
일본 애니메이션(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2007년작)에서 답을 얻어보자. 벚꽃 잎이 바람에 날려 떨어지는 속도가 '초속(秒速) 5센티미터'라고 하니 그것 참 좋겠다. 활짝 핀 진분홍 꽃무릇도 초속 5센티미터로 시들고, 울긋불긋 단풍잎도 초속 5센티미터로 떨어지고, 설국의 풍경도 똑같은 속도로 찾아왔으면 좋겠다.
벚꽃 잎이 짧게 피었다가 꽃비처럼 우수수 떨어져 내릴 4월의 봄날도 초속 5센티미터의 속도로 찾아왔으면 좋겠다. 이 가을부터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며 세상 사는 모든 일에 그만치 신중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