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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과 함께 찾아온 것들

올겨울이 시작된 이야기

by 블루밍드림

11월이 다 저물어가던 어느 날, 겨울을 알리는 전령처럼 첫눈이 내렸다. 폭설이었다. 긴 밤 지나 날이 새니 대도시 속 아파트 풍경마저 홋카이도의 여느 설경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얘들아, 일어나. 눈이다, 눈. 나가서 눈사람 만들자." 이제는 전혀 통하지 않을 먼 옛날의 본능적 호들갑을 슬그머니 다시 꺼내는 건 여태 철들지 못한 내 영혼의 역할이었고, 난 무거운 몸을 끌어 마지못해 출근길에 나섰다.


눈이 조금 녹아든 어느 뒷날, 집 근처 산에 올랐다. 잎을 떨구는데 늑장을 부렸던 아까시나무며 잎이 단단한데도 가지를 쩍 벌렸던 소나무며 수증기를 흠뻑 머금은 습설(濕雪)의 무게를 이기지는 못하였다. 몇십 년을 더 살고도 남을 터인데, 속절없이 꺾여버린 나뭇가지들이 도처에 널브러져 있었다. 공중을 배회하던 드론이 방심한 적군의 머리 위로 폭탄을 투하한다는 요즘 전쟁터의 참상을 보나 싶었다.


첫눈이 와서였나 보다. 버스로 갈아타려 빠져나오는 지하철 역사에서 구세군을 보았다. 네온조명에 젖어든 도심을 걷다 구세군과 맞닥뜨릴 때면 아이들 벙어리장갑에 가벼운 지폐 한 장씩을 끼워 등을 떠밀던 어느 옛날을 떠올렸다. 퇴근길 내 지갑은 늘 헛헛하였기에 이제는 지폐 몇 장쯤 끼워두리라 마음먹었다. 우리 아파트 앞 대로 건너 프랜차이즈 빵집 길모퉁이에선 지난겨울 여든은 넘은 듯한 할머니가 연탄화로를 놓고 밤을 구워 팔았다. 어쩌다 한 봉지 주문하고선 가까이 쪼그려 앉았더니, 손이 느려서, 몇 개가 타서 미안하다 하였다. 첫눈이 왔으니 다음 퇴근길에는 횡단보도를 반대 방향으로 건너 보리라 마음먹었다.




첫눈이 오고 난 후 일주일쯤일까. 연말이면 패배감에 끙끙 앓고 마는 루저 직장인의 별 것 없는 어느 밤이었다. 지어지앙(池魚之殃)*의 재앙(災殃)이 난데없이 내게로 왔다. "서아프리카 나라 기니에서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수백 명이 체포됐다고...", "서아프리카 니제르에서 군부가 TV에 등장해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그 나라의 누가 정의롭고 누가 더 사악한지 따질 필요가 없었다. 약간의 경멸이 내포된 측은지심으로 혀를 차던 불과 몇 해 전의 내 처신들이 봉인된 기억을 깨고 비어져 나와 밤새 몸서리를 쳐야 했다.


월화수목금 마지못해 출근하던 그 섬에,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그 섬에, 여러 날, 빨간 꽃빛 노란 꽃빛 사람들에 곱게 물들어 들불처럼 번졌다. 무기력보다는 분노가 나을 터였다. 매서운 바람에 맞서며 서강대교를 걸었다. 자칫 초연(硝煙)이 쓸고 갈 뻔 한 섬을 간간이 뒤돌아보았다. 흰 눈이 또다시 온 세상에 소복소복 쌓일 때면 풍진(風塵)의 이 도시 구석구석이 홋카이도의 여느 설경처럼 한가롭기를 바랐다.




그리움을 잔뜩 머금은 "오겡끼데스까(お元気ですか)"를 목놓아 외치던 '러브레터'의 여배우 마카야마 미호가 숨진 채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들려온 건 첫눈이 오고 열흘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어느 겨울 충무로 대한극장에서 러브레터를 보던 나와 그녀의 청춘도 그렇게 또 몇 꺼풀쯤 저물어 갔다. 세상엔 대단하게 살지 않는 삶이 훨씬 더 많을 터인데, 이번 겨울은 "또 한 번의 겨울, 당신은 잘 지내고 있나요?"라던 영화 포스터 카피에 유난히 가슴이 엔다.


오늘 퇴근길에도 지하철 역사의 소음 속에 서서 딸랑딸랑 종을 울리는 구세군을 보았다. 지갑에 지폐 몇 장 채워 넣기가 이토록 어려운 일인가 싶다가도 마음이 이내 흐트러졌다. 우리 아파트 앞 중앙차선 버스정류장에 내려서서 반대로 길을 건너볼까 망설이다가도 금세 심란해졌다. 빵집 길모퉁이를 돌아 연탄 화로와 군밤 할머니를 찾을 수 있을까 조금은 궁금하였다. 이번 겨울은 첫눈이 오고 나서 슬픈 일들이 참으로 많구나 싶었다. 그래서 잊혀 간 것들도 참으로 많구나 싶었다.


흰 눈이 또다시 온 세상에 소복소복 쌓일 때면, 그저, 대단하지 않게 사는 사람들이 즐기기에 얼마든지 좋은 겨울이었으면 좋겠다.


*지어지앙: ‘연못 속 물고기의 재앙'이라는 뜻으로, 우둔한 왕이 연못 속에 보석이 숨겨져 있다는 말을 믿고 연못의 물을 다 퍼내었지만 정작 보석은 못 찾고 물고기만 떼죽음을 당하고 말았다는 이야기. 화가 엉뚱한 곳에 미치거나, 상관없는 일 때문에 재난을 당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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