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야!! 정이야!!
일어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목소리가 새벽을 찢는다.
아빠는 우리를 깨울 때 항상 큰딸의 이름을 불렀다.
세수도 하지 않고 터털 터덜 하나, 둘, 세,,, 넷, 그리고 다섯이 거실로 걸어 나온다.
눈뜬 사람은 없는데 분주히 손을 움직여 자기의 옷을 찾아 입는다.
그 사이 밖에서 드르릉, 드르릉 시동 켜는 소리가 들리며 출발을 알린다.
앞 좌석에 따로 트럭짐칸에 따로따로 제각각의 방식으로 탑승한다.
15분 정도 달렸을까.
눈을 감고도 선명한 그 길이 펼쳐진다.
안갯속에 감춰진 또 하나의 집 비닐하우스.
손톱에 지워지지 않는 물이 드는 것을 방지하고자 양손에 비닐장갑을 끼고 빨간 바구니를 들고 걸어간다.
늦게 걸으면 시간만 늦어지는데도 자꾸 걸음은 느려진다.
방울토마토가 내 키 보다도 더 크게 자라면 빨갛게 익은 방울토마토가 수확을 기다리고 있다.
누가 기다리라고 한 것도 아닌데..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데..
쭈그리고 앉아 차곡차곡 방울토마토를 따서 바구니에 담으며 시간은 흐르고 바구니는 차오르고 땀방울은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한다.
머리카락은 방울토마토 가지 잎으로 인해 노랗고 초록빛 물이 든다.
몇 번을 씻어도 잘 헹궈지지 않는 그 특유의 색과 냄새.
방울토마토는 빨간색인데 방울토마토가 남김 색은 노랗고 초록빛이라는 게 이질감을 안겨주었다.
난 너희와 달라.
그게 싫어서 모자를 쓰면 방울토마토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우리보다 소중한 것은 방울토마토였으므로 지켜줘야 했다.
가지치기를 해도 비닐하우스 안의 방울토마토의 잎은 밀림을 연상케 무성했다.
밀림 속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자 쭈그리고 앉았던 엉덩이를 바닥에 내려놓으면 싸한 기분이 스며든다.
엉덩이에 생긴 빨간 자국.
도랑에 나뒹굴며 짓이겨진 토마토에 내가 엉덩이가 눌린 것인지, 토마토가 눌린 것인지 서로 네탓공방을 펼친다.
비닐하우스에는 다양한 식구가 살았다.
수박, 오이, 애호박, 고추, 토마토 마지막 정착이 방울토마토였을 뿐.
이 중에서 절대 하지 말자 고했던 고추는 정말 지옥이었다.
잘못 밟으면 터치는 매운맛에 눈물을 쏙 빼기도 했고, 새벽녘 포대 가득 차도록 담았던 고추가 오후가 되면 익어 있던 도돌이표를 경험하면서 이건 아니라고,, 이건 아니라고 서로 이야기했다.
가위로 잘라내면 속도가 더딘 것은 물론 더 이상 손아귀에 힘이 없을 지경이 되었다.
그렇다고 손으로 하나씩 담으면 비닐장갑으로는 막을 수 없는 손톱 물은 며칠을 간다.
면장갑을 끼고 하면 가지 사이에 있는 고추를 따기 어려워 가지까지 부러 뜨리게 되어 아빠의 불호령이 떨어지곤 했다.
부러진 가지는 어디로도 숨길곳이 없으니까.
오후가 되면 시들어 버리니까.
그렇게 욕을 먹으며 고추를 땄다.
우리가 흘린 눈물은 고추가 매워서 흘린 눈물이었다.
분명히.
고추는 토마토보다 정글을 이루는 밀도가 상상초월이었다.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 정도의 끈끈함.
너네만 끈끈하게 아냐, 우리도 그래.
오기 섞인 마음으로 우리 형제들은 버티고 나아갔다.
바라는 건 수고했다, 고맙다 다정한 말이었는데 그 말대신 아빠는 술을 드시곤 돌아와 주무셨다.
난 빨갛고 초록인 것들이 싫다.
빨갛고 초록인 것들 덕분에 세상은 풍요롭다.
일찍 아침을 시작하고 제각각 학교로 회사로 향했다.
시간은 흘렀다.
지금도 그때처럼 회사에 출근해 앉아 있다.
시간은 흘렀지만 나는 흐르지 않고 과거에 앉아 있었다.
언제쯤 일어나 걸어 나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