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 해 봐요』
제목을 보자마자 바로 마음이 동하여 빌려온 판사 김동현님의 에세이입니다. 카이스트를 졸업한 후 적성에 맞지 않아 연세대학교 로스쿨에서 공부하고 있었던 김동현 작가는(현재 판사님), 간단한 시술 도중 발생한 의료사고로 시력을 잃었다고 합니다.
'의료사고로 시력을 잃었다'는 대목을 읽자마자, 울컥 눈물이 났습니다. 시력을 잃은 것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그 고통이 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거든요. 절망을 딛고 일어서서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결국엔 극복해 나간 이야기를 읽으니 울컥했습니다. 저도 비슷한 일이 있었거든요. 브런치에 잠시 발행했다가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인 것 같아서 다시 닫아두는 바람에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요.
과잉진료로 멀쩡하던 눈에 레이저 시술을 하는 바람에 오히려 이상이 생겨서 몇 해를 고생을 했지요. 지금도 여전히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에는 눈 상태가 더 좋지 않아져서 고생하고 있지만, 예전만큼 절망적이지는 않습니다. 이젠 더 나빠질까 두려워하거나 원망하기보다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적어도 눈은 보이니까요. 감사한 일입니다.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라는 정신과 의사가 제시한 인간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5단계입니다. 이 단계는 죽음뿐만 아니라 큰 사고를 당한 사람들에게도 비슷하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단계는 순서가 바뀌어 나타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한꺼번에 나타나기도 하며, 한 단계가 몇 번에 걸쳐 나타나기도 한답니다.
내가 처한 상황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어서 부정하는 단계, 자신이나 타인 혹은 현실에 대해 분노하는 단계, 타협하는 단계, 우울의 단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처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수용의 단계.
김동현 판사님은 부정의 단계가 끝나고 바로 수용이 찾아왔고, 그 위에 분노와 우울이 덧입혀졌다고 합니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앞으로 나갈 수 없고. 지나간 선택을 후회해 봐야 그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며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해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서 분노하고 원망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여러 날을 여러 달을 여러 해를 거쳐 비로소 받아들이게 되었던 진리를 김동현 판사님은 빨리 깨달으셨더라고요.
분명히 글을 쓰면서 다시 떠올리는 것조차 버거울 만큼 힘든 일이었을 텐데.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그리고 책을 읽다, 운명같이 한 구절을 만났지요.
삶을 정성껏 사는 사람은 원망하지 않습니다.
삶을 정성껏 사는 사람은 절대 남의 탓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병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고
다른 이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억울하다고 항변하지도 않습니다.
탓하고 원망하는 대신
오히려 정성껏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삶을 정성껏 산다는 것은
어느 순간에도 자신을 방치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병에 좌절하고 타인을 향해 분노하고,
억울함에 복수를 꿈꾸는 것은
정성을 다해 사는 사람의 자세가 아닙니다.
-좋은 건 다 네 앞에 있어. 성전스님-
“탓하고 원망하는 대신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오히려 정성껏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쉽지 않은 일이지요. 탓하고 원망하는 감정이 먼저 올라올 텐데요. 그런 감정이 올라오면, 저는 일단 받아들이려 합니다. 일단 내 감정을 수용해 준 다음 빨리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고요. 남을 원망해봐야, 상황을 탓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요.
어찌할 수 없는 일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구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빨리 찾겠습니다. 되도록이면 희망을 찾아서 다시 정성을 다해 살겠습니다. 나를 방치하지 않고. 정성껏이요.
좋은 생각을 하면 할수록 좋은 것들을 끌어당기고 있는 느낌입니다. 그동안 고통스럽게 앓았던 경험들도 필요 없던 경험들이 아니라, 오롯이 이렇게 받아들이며 다음 단계로 전진하기 위한 경험들이 었다고 생각하니 감사합니다.
저의 이야기 역시 그 누군가에게 위안이 되었으면. 응원이 되었으면. 희망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제는 정말로 ‘뭐든 해 봐요.’ 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