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학 후 첫 천문학 시간에서 과고생 매운맛을 보고 바로 변절(?)한 노노루…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할 줄 아는 것도 하나 없는 딸이
육지 대학 들어간다고 집 떠난 지 반년도 안 돼
갑자기 미대로 전과한다고 했을 때 엄마의 심정은 어땠을지.
게다가 1학년 1학기는 난생처음 고향과 집을 떠나 ‘자유’의 참맛을 제대로 느껴버린 노노루
(라고 쓰고 망나니로 읽는다)가
‘통제의 화신’ 울 엄마에게 불안감을 한껏 안겨주고 있던 시절이었다.
엄마는 그때나 지금이나 ‘무엇을 하든 그 분야에 최선을 다하라’는 지상명제에 따라
큰 반대 없이 전과 지망을 허락하셨고,
지인을 수소문해 일부러 홍대에 있는 미술학원까지 알아보며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셨다.
(엄마, 사랑해요. 흑흑.)
그렇게 홍대 ‘선’ 미술학원에 등록해서 중·고등학생들 사이에서 처음으로 입시 미술을 시작한 노노루.
10년도 더 전이라 정확하진 않지만 전과 조건에 ‘실기 시험’이 있었던 것 같다.
여느 미술학원처럼 선 그리기, 명암 표현하기를 거쳐 석고상 데생을 시작했는데,
기억에 남는 건 ‘무조건 시간 내에.’
최대한 빠르게 비율에 맞춰 부피감을 잡고 점점 세세하게 묘사를 해나가는 식이었던 거 같은데
조금도 쉬지 않고 정신없이 결과물을 향해 달려갔다.
그럼에도 1달 여의 시간 동안 겨우 연필과의 사투를 벌이느라
샤대 실기라는 까마득한 목표에는 조금도 다가서지 못한 느낌이었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샤대는 다른 대학과 달리 ‘창의성’에 중점을 둬서
묘사에 어느 정도 통달하고 난 후에도 ‘상상과 표현’의 기술도 갈고닦아야 했던 것.
(분야 이름이 따로 있었는데, 기억이 안 난다.)
무엇보다 1학기 내내 샤대 인근 고시촌에서 놀고, 먹고, 부르며 (노래방)
허송세월하느라 학점관리는 신경도 안 썼거든…
대장금은 까맣게 잊고 있던, 아니, 차라리 애써 외면하고 자포자기하고 있던 성적이
턱걸이로 겨우겨우 넘겼다는 걸 1학기 보고서 제출기한 며칠 전에야 깨달아서
(급하게 신청서 쓰고 학과장님께 추천서 부탁드리고 난리 부르스)
갑자기 장학금의 소중함을 느껴버렸다.
미대로 전과하게 되면 이 4000만 원을 포기해야 할 거 같아 (이미 받는 건 뱉어내야 할 거 같아)
현실적으로 ‘복수전공’으로 목표를 바꿨다.
인스타그램 댓글로 ‘복수전공이 어디가 현실적이냐’고 지탄받았지만,
제 나름엔 어느 것도 포기할 수가 없어서요.
죽이 되는 밥이 되든, 대장금은 살리면서 본전공은 넘겨 두자고 각오하고
미대 복수전공은 마음에 품고만 있던 3학년 여름 계절학기의 어느 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프랑스어입문 3’으로 만난
서양화 복수전공 지망 학우의 한 마디로 정신이 퍼뜩 들었다.
“미대 수업 그렇게 만만한 거 아니야.”
미대 복수전공을 위해 그동안 넌 무얼 했느냐 다그친 끝에 던진 그 한 마디가
마치 ‘나는 되지만, 넌 안 될걸?’로 들려버려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
그로부터 반년 후, 4학년이 되는 겨울방학 복수전공 신청을 위한 포트폴리오를 만들기 위해
신림에 있던 ‘TOM’ 미술학원의 문을 두드렸다.
이 놈(?)의 미술학원들은 대체 왜 다 언덕에 있는 거냐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