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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본이 Dec 08. 2024

유얼쏘스트롱

뉴질랜드 워킹 홀리데이 프롤로그 18


크고 작은 걱정들이 24시간 쉬지 않고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나에게 필리핀 어학연수는 걱정덩어리 그 자체였다.


일단 한국에서 하던 모든 일을 내려놓고 가는 것도 두려웠고 퍽이나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다.

그렇게 시간과 돈을 투자했는데 나에게 '영어'라는 결과물이 남지 않을까 봐 매일 전전긍긍했던 거 같다.

그리고 언어 공부를 하다 보면 반드시 마주하게 되는 게 '정체기'다.

언어라는 영역을 반드시 시간이 축적되어야지 발전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서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멀리 바라보려고 해도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런데 오늘을 기점으로 앞으로 내 어학연수가 어떻게 끝나도 이 시간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함께 자연 암벽등반을 갔던 친구 중 한 명이 일로일로에서 클라이밍장 오픈 이벤트가 있는데 팀 세부로 함께 참여하지 않겠냐고 물어봤다.

토, 일 이렇게 1박 2일밖에 시간을 낼 수 없는 상황이라 비행기까지 타고 클라이밍 대회를 하러 가는 게 너무 무리는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선뜻 응한다고 얘기하지 못했지만 몇날 며칠 머릿속에서 계속 일로일로 클라이밍 대회가 생각이 나서 '에라 모르겠다'하고 일로일로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그리고 냅다 다음날 일로일로로 새벽 비행기를 타고 클라이밍장 오픈 이벤트에 참여해야 하는 나였지만 친구가 함께 불금을 보내자는 제안에 솔깃해 세부클럽에서 밤새워 놀고 넘어간 미친 각성 상태였다.


비몽사몽인 체 도착한 클라이밍장의 분위는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나는 이 밝고 건강한 클라미머들의 에너지를 참 좋아한다.

다들 몸을 풀며 오늘 자신들이 풀게 될 문제들을 보면서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한다.

그리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그 눈동자들을 보게 되면 괜히 내 마음도 건강해진다.


어느 클라이밍 이벤트와 비슷하게 나의 이름을 말하고 참가 번호표와 티셔츠를 받았다.

옷을 갈아있고 몸을 풀며 앞으로 나는 어떤 문제들을 공략할지 생각하면서 클라이밍장을 쭉 둘러보다 보니

세부의 클라이머 친구들이 속속히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들과 가벼운 안부를 묻고 함께 루트파인딩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novice(초보자)' 카테고리 참가자라 앞서 중상급자들의 예선전이 치러지는 걸 구경하며 응원했다.

모두가 뒤에서 응원해 주는 그 목소리를 듣고 있다 보니 내 심장 박동수도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이어서 나의 차례가 되었다. 예선전은 2시간의 제한 시간 동안 더 높은 점수를 딴 순서로 결승에 올라가는 것이다. 하지만 채점 방식에는 시도 횟수도 포함되기 때문에 높은 점수의 문제를 많이 푸는 것도 중요하지만 괜히 시도 횟수가 올라가지 않게 내가 풀 수 있는 난이도의 문제로 점수를 많이 쌓는 것도 전략이라면 전략이다.


하지만 사람이 도파민과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면 그런 전략이 머릿속에 남아있을 리가…. ㅎ

그냥 닥치는 대로 문제를 풀고, 어려워서 안 풀리는 문제는 씩씩거리면서 또 시도하기를 반복하다 보니 금세 예선전 시간이 흘렀다. 점수 집계를 기다리면서 점심을 먹는데 주변의 친구들이 지나가면서 결승간 거 축하한다고 이야기하는 게 아닌가?

띠용? 내가 결승을? 한국에서 클라이밍 이벤트가 열렸을 때 빠지지 않고 다 참여했던 적이 있는데 그럴 때마다 한 번도 결승에 올라가 본 적이 없는 내가 결승이라고?


아직 결과 발표가 난 게 아니니 괜히 김칫국 마시지 말자고 들뜬 마음을 다스려 보지만 기대되는 마음을 어찌하지 못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데 6위부터 한 명씩 이름을 부르는 데 3위가 불리는 동안 내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아 나는 결승 진출은 못 했나 하는 순간 1등 이름으로


"팀 세부 보니킴!"


내 이름이 불리는 게 아닌가?


결승에 진출한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한 게 심지어 1등으로 진출이라니 내 인생에 이런 경사가 있을 줄은 몰랐다.

처음 해보는 결승 진출에 기쁜 것도 잠시 너무 긴장돼서 터질 거 같은 심장을 겨우 진정시키고 격리구역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 순서가 되어서 다시 들어간 클라이밍장에는 결승 문제가 세팅되어 있었다.

달달 떨리는 손과 심장을 토닥거리며 첫 번째 문제를 풀기 시작했는데


웬걸? 또 홀드들이 다 손에 촥촥 감기는 게 아닌가


잠을 못 자서 각성한 정신 상태와 주체를 못 하고 달달 떨리는 손과 심장으로 대환장 파티였던 것과는 다르게 결승의 모든 문제를 한 번에 끝냈다.


그렇다.


먼 타국에 와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클라이밍 이벤트 경기에서 1등을 해봤다.


물론 초보자 카테고리지만 내가 경기에서 문제를 푸는 순간만큼은 올림픽 국가대표 저리 가라 할 정도의 긴장과 설렘이었다.


하지만 내가 1등을 한 것보다 더 기분이 좋았던 건 그곳에서 만난 모든 친구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말해주는


"you are so strong!"


이게 그렇게 기분이 좋았다.

짧은 영어였지만 친구들과 기쁨을 나누고 축하 받으며 그래도 조금씩 늘어가는 내 영어에 안심이 되었다.

클라이밍 대회로 자기 효능감을 무한히 충전하고 온 하루였고 또 새로운 친구들을 참 많이 사귄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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