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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본이 Dec 16. 2024

자본의 깔때기

뉴질랜드 워킹 홀리데이 프롤로그 19

필리핀 어학연수에 대한 글을 쓸 때면 꼭 한 번씩 언급되는 게 돈인 거 같다.

나의 글에 돈, 돈거리고 싶지 않지만 내 인생에서 공부를 위해 이렇게 큰돈을 써본 게 처음이고 앞으로 두 번은 없을 거 같은 낯선 경험이라 더욱더 반복하게 되는 거 같다.


어학원 바로 옆에 쌈닭 농장이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 해봤지만 내가 공부할 교실이 닭장일 것이라고도 상상해 보지 못했다.

어학원에 도착한 첫날 정말 열악한 기숙사 상태에 한숨이 푹 쉬어졌지만, 저렴한 어학원을 선택했기에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할 부분이라고 여겨왔다.

하지만 큰 건물 두 채에 1평이 채 되지 않는 닭장 같은 교실들이 빼곡히 늘어져 있는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숨이 턱 막혀왔다.


창문도 없는 그 작은 공간에서 아침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는 노동 환경이 과연 합리적인지 그리고 그곳에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공부 환경으로 적합한지 볼드체의 물음표가 내 정수리 위에 커다랗게 생겨났다.


나에게 있어서 누군가에게 지식을 가르칠 수 있는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전문직이다.

그 전문성을 인정받아 보다 좋은 임금을 받는 것에 전혀 불편함이 없다.

하지만 전문가가 그에 맞는 대우를 받지 못하면 괜히 마음이 꽁해진다.

물론 어학원에서 만난 선생님들이 모두 다 좋은 수업 기술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나보다 영어를 잘하고 나에게 인풋을 주는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선생님들의 하루 일당을 알게 되었을 때의 당황스러움을 숨길 수 없었다.


가끔 나도 세부의 비싼 물가에 흠칫 놀랐을 정도로 세부에서 생활비가 절대 저렴하지 않다.

필리핀의 흔한 패스트푸드점인 졸리비에서 가서 세트 메뉴만 하나 주문해도 100페소(약 2,400원)가 훌쩍 넘고, 오토바이 택시비, 마트에서 과일 조금만 사도 100페소는 껌값처럼 나온다.


그런데 영어 선생님들이 저 닭장 같은 교실에서 하루 종일 7~8명의 학생을 꼬박 가르치고 받는 돈으로 500페소(약 12,300원)라는 소리를 듣고 나서 도대체 내가 낸 그 많은 돈은 어디로 간 것일까 궁금했다.

열악한 기숙사 환경에, 음식 재사용을 숨길 의지도 보이지 않는 급식에, 환기도 잘 안되는 닭장 같은 교실이 내가 낸 돈에 관한 결과라면 꽤 당황스럽다.


심지어 학생 한 명당 10페소의 보너스(?)가 있는데 내 몸값(?)이 고작 10페소인 것도 불쾌했다.

선생님들이 가끔 "너네는 부자잖아~"라고 이야기할 때면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내 통장 잔액을 까고 싶었지만 정말 보잘것없는 통장 잔액이라 어색한 웃을 지으며 "아니에요 나 돈 없어요~"라고 하며 넘어갔었는데 내가 경험한 세부의 물가에 선생님들의 월급이라면 어학원 안에서 영어 공부를 하는 우리 팔자가 충분히 상팔자로 보였을 거 같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얻는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당혹스러웠지만 필리핀 평균 임금을 봤을 때 아주 적은 임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선생님들의 재능과 학생들의 돈을 깔때기에 콸콸 쏟아부어서 모이는 곳에 누구의 배를 불려주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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