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이모 3호 되던 날

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4#10

by 끼미


“맛있게 드세요~”

“카이똥(開動, 잘 먹겠습니다)!”


작년 크리스마스 이후로 네 달 만이었다. 여러 사람과 함께 밥 먹는 게. 새로운 쉐어하우스 식구들과 함께 하는 첫 식사 자리는 조금 긴장됐다. 다섯 명 다 젓가락은 있는지, 음식이 모자라진 않을지 혼자 괜히 신경 쓰였다. 하지만 제일 걱정되는 건 이거였다. ‘무슨 말해야 되지?’




“생각보다 괜찮은데요? 바나나 맛 별로 안 나요.”

“Umm, delicious!”

“으아, 매워요. 마마, 물 주세요!”


우리들의 첫 저녁 식사는 그야말로 난리법석이었다. 저쪽에선 집주인 쑤의 아들인 아카가 옆방 언니표 김치 먹고는 매워서 헥헥거리고, 쑤의 러시아인 남자친구 로먼은 통조림 번데기 먹이려는 옆방 언니랑 투닥거리고, 식탁 아래에선 소세지 냄새 맡은 시바견 차이차이가 한입 달라고 쳐다보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동시에 웃겼다. 눈앞에 펼쳐진 이 혼란스러운 상황도 재밌었지만, 조금 전까지 온갖 걱정 다 했던 내 모습이 떠올라서 헛웃음이 났다. 그냥 같이 밥 먹는 것뿐인데 혼자 뭐 그렇게 쫄아 있었을까. 유재석도 아니고 소개팅 나가는 것도 아니면서 뭘 그리 질문거리를 고민했었는지. 하여간 너무 진지해서 탈이었다.


쮠쮠 언니가 사준 에그타르트


그날 진지했던 사람이 나 말고 한 명 더 있었다. 아마 후식으로 쮠쮠 언니가 사 온 에그타르트를 먹고 있을 때였던 것 같다. 식탁 맞은편에서 엄마인 쑤랑 얘기하던 아카가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 한궈 아이 싼하오!@#$^#!”

그 말에 모두가 웃었다. 나만 빼고.


갑자기 툭 던져진 아카의 말. 알아들었지만, 동시에 알아듣지 못했다. 일단 내가 이해하기론 이랬다. ‘한궈(韓國)’는 한국, ‘아이(阿姨)’는 우리나라의 이모 또는 아줌마 같은 호칭(이라고 대만 드라마에서 배웠다), ‘싼하오(三號)’는 3호. 그러니까 아카는 나더러 ‘한국 이모 3호’라고 한 거다.


근데 그게 뭔 말이지? 다들 웃고 있는 와중에 또 나 혼자 심각해졌다. 이모라는 말이 슬프지만 지에지에(姐姐, 누나)라기엔 나이가 많으니 오케이, 인정. 근데 왜 3호지? 1호라고 하기엔 나랑 안 친해서? 그럼 1호는 옆방 언니인가? 어떻게 하면 1호가 될 수 있지?


무슨 뜻인지 설명은 안 해주고 싼하오만 반복하는 아카를 보며 답답해 죽으려는데, 구세주가 등장했다. 나와 같은 세종대왕님의 후예, 옆방 언니였다.


“롱롱이 세 번째예요. 이 에어비앤비에 온 한국인 손님. 내가 2호고, 1호는 나 오기 전에 있었던 여자분이에요.”


아, 그런 거였어? 언니의 명쾌한 설명에 답답했던 속이 뻥 뚫렸다. 그리고 다시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 짧은 순간, ‘3호’ 이 두 글자 가지고 온갖 소설을 써댔던 내가 스스로 보기에도 어이없었다. 조금은 짠하기도 했다. 3호 말고 1호가 되고 싶다는 그 말에서 나도 이 집 식구들과 더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이 보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한 달 후면 떠날 테니 그 누구에게도 정 주지 않겠다던 말은 역시 거짓말이었다.


“아카 너무 하네~ 나는 한참 지나서 2호로 인정해 줬는데, 롱롱은 이렇게 빨리 3호 시켜주고~”


옆방 언니가 장난스럽게 서운하다고 말하자 아카는 아까와 같이 진지한 표정으로 나름의 이유를 설명했다. 생각보다 아카에게 이 한국 이모 인정이 꽤 중요한 듯했다. 현재는 대만의 다른 곳에서 지내고 있는 1호 이모와도 여전히 연락을 주고받고 종종 만난다는 얘기에서도 알 수 있었다. 아카에게 한국 이모들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손님 이상으로 의미 있는 존재라는 것을.


“고마워 아카. 날 3호로 받아줘서 영광입니다!”


나의 인사에 아카는 주방 앞 소파로 도망갔다. 영락없는 어린애 같은 그 모습이 귀엽고 또 귀여웠다. 진심으로 기뻤다. 센 척 하지만 수줍음 많은 저 아이의 마음에 내 자리가 생겼다니.


아무래도 이 집에서 조용히 지내긴 틀린 것 같다.



쑤가 준 두리안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 먹을래? 두리안 맛이야!”


두 시간째 이어진 저녁 식사. 이제 방에 가도 되나 눈치 보고 있는데, 쑤가 물었다. 엥, 냄새 고약한 그 두리안? 미간을 찌푸리자 쑤가 냄새 별로 안 난다고 꼬셨다. 망설이다가 “하오(好, 좋아)!”를 외쳤다. 아까 아카가 ‘삐엔스(扁食, 편식)하면 안 된다’고 했던 게 떠올랐다.


두리안 속살처럼 샛노란 아이스크림은 쑤의 말대로 향은 약하고 달콤해서 마음에 들었다. 역시 먹어보기 전엔 모르는 거였다. 부드러운 아이스크림을 베어물며 거실을 둘러보니 쉐하 식구들이 나랑 똑같은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몰래 웃었다.


손님에서 식구가 된 오늘, 아이스크림만큼이나 달달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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