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가까워져야 하고 기꺼이 가까워짐에 몸은 던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누군가를 오랫동안 기다려 본 일이 있습니다. 기다리는 일은 탱탱했던 대추가 쪼글쪼글해지는 과정을 보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초록색 대추가 시간을 업고 향을 입으면서 점차 말라가고 주름지고 짙은 색이 변하는, 누군가를 마음에 품은 채로 기다리는 것은 그런 일이라고요.
오늘 문득 폭력은 어쩌면 가까워지려는 욕망에서 발생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이 머릿속에 생겼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가 되고 싶다는 욕망의 저편에는 홀연 이 세상에 태어나 우뚝 서 있는 존재가 자신의 미약함에 몸서리치다가 그 결핍의 해소를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은 아닐까, 하고요. 당신과 하나가 되고 싶다는 불가능하지만 아름답기도 한 믿음이 부서져 내릴 때 우리는 다시 세상과 분리되어 외딴섬에 혼자 우뚝 서 있는 상태가 됩니다. 늘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기본값에 대해서 늘 분통을 터트리곤 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프랑스의 철학자 롤랑 바르트는 말했습니다. 기다리는 자는 시간을 먹고 자라납니다. 시간을 통해 대상과 거리를 두게 되고 멀어진 거리만큼 회한이 깊어지기도 합니다. 당신이 멀어지면서 나의 팽이는 느리게 돌아갑니다. 그리고 언제나 기다리는 사람은 노스탤지어 속을 헤엄치지요. 어쩌면 어디로든 돌아가고 싶은 유토피아를 인간은 언제나 마음 한편에 지어내곤 막막한 생을 이겨내는 것은 아닐까요.
나는 왜 이렇게 산을 갈까,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달리는 일은 평지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지요. 그러나 산을 오르면 저 멀리 있는 또 다른 산이 멀어진 거리만큼 희미하지만 우뚝 솟아있는 것을 봅니다. 또 저 멀리 펼쳐진 하늘의 구름도 봅니다. 나는 자연의 가늠할 수 없는 거리에서 오는 위화감을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잡히지 않아야 하고 가까워질 수 있을 듯, 언제나 내가 가 닿기는 어려운 자연경관을 마주하자면 나는 하찮아져서 좋습니다. 하찮아진 만큼 나의 마음은 나에게서 멀어집니다. 멀어진 마음을 경관처럼 바라보고 있자면 꽤, 나쁜 것들은 걷어지고 또 한없이 투명해져선 그랬구나, 하고 말 나의 것이 아닌 어떤 것을 보고 있는 기분이 듭니다.
당신을 사랑했던 일을 생각하면서 기다리면서 나는 나를 기다리는 법을 배웠습니다. 기다림은 대상을 멀리 두고 바라보는 일, 멀어진 거리만큼 존경을 담게 되고 존중을 꽃처럼 피워내는 일이라고 느꼈습니다. 멀어진 마음의 끝에 집요하게 걸려있는 고집과 집착은 결국 나를 사랑해 내지 못해서 당신을 끌어당기고 싶어 하는 욕심으로 나타났음을 알게 됩니다. 가지고 싶다는 욕망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치환했던 시간을 멀리서 바라봅니다. 일순 나는 자유로워짐을 느낍니다. 순식간에 아이가 됩니다. 아이가 된 내가 나를 바라봅니다. 나는 그 아이를 마주 볼 수 있게 됩니다. 손을 잡아보려고 합니다. 늘 있었던 나의 순수에 대해서, 늘 옆에서 보듬어야 했던 나를 다시 한번 안아보려는 용기를 내어봅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멀어지기 위해 산을 향해 걸었고 달렸던 시간이 만들어 낸 관조가 가져다준 일입니다. 기적이라고 여기는 것보다는 일상의 배경이 달라진 것뿐입니다. 배경이 달라졌을 뿐 내가 가진 것들은 똑같은데 장르가 다릅니다. 나는 사는 것이 즐거워집니다. 앞으로 또 어떤 사랑으로 어떤 슬픔이 올지도 기대가 됩니다.
이제 막 태어난 것 같다는 기분이 종종 들곤 하는 요즘입니다. 나는 이제 막 태어나서 활달하고 순진무구해지려 합니다. 그것이 좋아요. 모든 것을 받아들여서 흠뻑 마셔보고 체해도 보려는 호기심을 가지게 된 것이 좋아요. 작은 나는 모든 사물과 사람이 멀어요. 멀어진 만큼 열린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자꾸만 더 어려지고 싶습니다. 언젠가 점점 더 늙어가더라도 여전히 마음은 바닥에서 낮게 움직이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멀어져요, 단단히. 너무 가까워지지 말아요. 서로, 그만큼 더 존중하고요. 격렬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