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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 당신 말고 나야.

by 송유성

그가 떠나고 몇 개의 계절이 흘렀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에 대한 생각에 다른 바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영화 ‘500일의 섬머’에서 남녀 주인공이 영화 ‘졸업’의 마지막 장면을 함께 보면 서로 다른 감상을 갖는 것처럼 말입니다.

만약에 내가 기억했던 모든 좋은 추억들을 그가 뒷면만 기억하고 있다면 그건 좋은 추억으로 기록될 수 있는 일일까요. 내가 고즈넉하다고 좋았다 기억했던 산청의 추억을 그는 오래된 시골집의 불편으로 기억한다면, 내가 조잘조잘 수다를 떨면서 걸었던 댑싸리가 가득했던 근린공원에서 그가 ‘이 여자는 알 수 없는 문학과 드라마에 관련된 이야기만 하네.’라고 기억한다면, 그건 좋은 추억이 될 수 있을까요. 시간이 지나서 재평가되는 예술 작품들처럼, 어떻게든 로맨스로 남아야 한다는 광기와 같은 집착에 불과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들이 갑자기 막힌 수도꼭지가 뚫린 것처럼 콸콸 쏟아집니다.


그렇게 막지 못하는 생각을 하다가 예전의 썼던 글들을 찾아서 읽어보고 그를 보고 싶어 하며 울었던 수많은 시간을 떠올려보다가, 입 밖으로 아뿔싸, 새어 나오고 맙니다. “나쁜 놈”하고요. “진짜 나빴다.” 하고 말입니다. 그게 또 참 웃긴 일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옳은 세상과 또 자신이 만들어 내야만 하는 물질적인 목표를 향해 살아가는 삶은 중요하다 여기면서 자신을 사랑하는 한 여자의 마음과 세계에는 관심조차 없는 남자가, 과연 대단한 자기 구원에 도달할 수 있을지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의 뒷면에는 내가 그를 뒤늦게라도 깎아내려서 나를 구원해 내려는 옹졸함이 또 있지는 않은지도 함께 생각합니다. 사람은 자신을 구해내는 일에는 적극적이지만 나를 버리면서까지 다른 누군가를 구하는 일에는 많이도 머뭇거리곤 하지요. 하지만 결국 그런 머뭇거림은 사랑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무용해지기도 한 일이기도 하겠습니다. 그래요, 사랑은 용기를 먹을 시간도 필요없이 누군가를 구하게도 하니까요.


그는 아니라고 했지만, 전 그가 저를 전적으로 믿은 적이 단 한 순간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비난하고 싶지는 않아요. 나약하고 순진한 그가 자신을 지키는 방법은 자신이 손수 만들고 경험하여 명확해진 것 외에는 어떤 것도 마음에 들이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아니까요. 그 길이 많이 잃지 않고 덜 상처받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니까요. 다만 나에게 그렇게 모질어야 했나. 싶은 생각도 듭니다. 그가 떠나고 저는 그렇게 좋아하던 술을 단번에 끊었습니다. 기껏해야 지인을 만나면 분위기를 맞추는 정도로 한 달에 한 번도 채 마시지 않게 되었습니다. 대신 끝없이 책을 읽어 내리고 매일 운동과 요가를 합니다. 그는 언제나 제가 건너왔던 힘든 과거를 제 나약함의 증거처럼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전혀요. 수십, 수백 번 무너져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지금도 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언제나 자신을 구해내는 힘이 단단히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이 오래 걸릴지언정 나는 언제나 나를 구해내었습니다. 그가 나의 내면을 조금만 궁금해해 줬다면 알았겠지요. 저는 생각보다 강하고, 강한 만큼 당신 곁에서 울면서도 온통 사랑만 주었다는 것을요.

그를 보내고도 그가 자신의 행복을 보류하고 살 것이 많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괜찮습니다. 지나간 추억이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기록될지는 결국 내가 쓰는 일입니다. 또한 떠난 사람이 어떻게 기록할지는 내가 신경 쓸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다가 다시 나쁜 놈, 안 나쁜 놈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남자주인공이 어떻게 자신의 영웅담을 쓰던 지금 내 삶의 여자 주인공은 나니까 다 좋게만 기록하고 싶습니다. 단지 나를 지키려면 너무 그 사람을 과대평가하지 말아야 할 일이라고는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 사람이 현명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비겁하다고 생각했지만서도요. 서로를 더 미워하기 전에 여기서 그만하는 것이 맞다는 그의 판단은 꽤 경제적이긴 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난 경제적으로 살고 싶지 않아요. 약간의 시간과 노력을 ‘애써’ 낭비하면서 살아야 인생이 낭만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어떤 사랑이 갔네요. 그리고 나는 여전히 여기 남아있어요. 남은 나는 어느 마음도 남김 없이 오늘을 오롯이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오늘은 아침에 새로 산 떡이 고소해서 기뻤습니다. 조그만 떡으로 기쁠 수 있다는 것, 그거면 또 된 것 아닐까 하고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작은 것으로도 잘 지내보겠습니다. 그건 당신 말고 나에게 하는 인사입니다.


“잘 지내, 나야. 누군가를 젖은 한지처럼 울면서도 그토록 사랑했던 나를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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