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른 것부터? 싱싱한 것부터?
좋은 건 좋을 때
지난주에 이어서 또 양배추 얘기다.
한 봉지 사 오면 끝까지 못 먹는 채소 베스트 3위 안에 늘 양배추가 들어간다. (나머지들은 부추, 미니 파프리카, 셀러리 따위다.) 어떤 요리의 부재료로 양배추가 필요해서 사긴 사는데 그 요리에 사용하고 남은 것은 냉장고에 한 번 들어가면 좀처럼 나오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양배추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또 부러 찾아서 먹는 편도 아니다. '남은 양배추 먹어야 되는데..'가 입안에서 맴도는 시간 동안 잔잔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결국은 냉장고 야채칸에서 탈출시키지 못해 그 안에서 사망하고야 만다.
닭볶음탕, 순대볶음에는 양배추가 꼭 필요하다. 그러고 남은 양배추는 (생으로 먹을 정도로 아직 싱상하다면!) 얇게 채를 썰어 가끔 돈가스 옆에 올리기도 한다. 남편이 속이 불편하다고 하는 날엔 두부쌈장과 양배추찜을 내기도 한다. 그 외엔 없다, 쓰임이!!
코울슬로니 양배추베이컨볶음이니 한 두 번 시도해 보지만 평소에 잘 안 먹는 메뉴는 기억에서도 금세 잊히기 마련. 오늘도 양배추는 냉장고에서 죽어간다.
그런데 이런 나를 잘 관찰해 보면, 독특한 부분이 발견되는데 바로 양배추가 시들고 있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그것을 꺼내어 요리하기가 더욱 힘들어진다는 점이다. 고유의 색을 진하게 띠며 아직 수분이 촉촉한 채소가 냉장고에 있다는 걸 알면 얼른 꺼내어 이런저런 요리를 하고 싶어 지는데 반해 남아서 넣어둔 채소는 쓰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심드렁해진다.
예전부터 나는 맛있는 건 아껴먹는 타입이었다. 과일을 사 오면 무른 것부터 먹고 제일 맛있어 보이는 건 냉장고에 저장. 엄마도 그렇게 하셨고 보고 배운 나도 그렇게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요가학원 원장님 댁에 갈 일이 있었는데 원장님께서 딸기 한 다라이 중 가장 예쁘고 맛있어 보이는 것들부터 골라서 씻으시는 게 아닌가?! 궁금해진 나는 무른 것을 지금 안 먹으면 나중에 못 먹게 되니 그것부터 먹어야 되는 것 아니냐고 여쭈었다.
- 아냐, 맛있는 건 맛있을 때 먹어야 해.
원장님은 단호하셨다.
- 무른 것부터 먹으면 맛있는 건 언제 먹을라구?
생각해 보니 맞는 말씀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 상태가 좋았던 것도 물러지는데 그럼 나는 내내 무른 것만 먹는 셈 아닌가? 그걸 왜 이제 알았지!
그때부터는 과일이나 채소를 사 오면 가장 싱싱해 보이는 것들부터 골라서 먹었다. 사온 그날, 그 과일이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그 하루를 잡아내어 풍족한 과즙을 즐긴다. 좋은 건 좋을 때.
하루이틀 지난다고 야채나 과일이 못 먹을 상태가 되는 건 당연히 아니다. 그러나 그 기간이 지나면 '좋을 때'로부터 급속도로 멀어지고 내 관심마저도 멀어지기 때문에 하루이틀 안에 승부를 봐야 한다. 평소에 장을 조금씩 보는 편인데도 집밥 소비량 자체가 적어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쉽지 않긴 하지만...
지금 우리 집 냉장고 야채칸에서 죽어가는 양배추를 꺼내어 심폐소생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좋을 때'가 아니니 과감하게 버려야 할까. 양배추는 씻는 것도, 먹는 것도 고민에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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