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뮤하뮤 May 17. 2024

우리가 김밥의 속도로 갈 수 있다면

음식 나눠먹기의 정수는

  [알림] 오늘 파도 김밥 팝업

 오이값이 3개에 4000원으로 내려간 겨울 어느 목요일, 친구 W가 문자로 긴급상황을 알렸다. 친구 4명이 있는 단톡방에 김밥 팝업 오픈 이유가 줄줄이 올라왔다. 미리 사둔 김밥 재료가 숨이 간당간당한 데다가 오늘 오이 환율이 납득할 만한 수준이라 김밥을 하겠단다. “오이가 드디어 3개에 4000원이야.”

나는 영화 <매드맥스>의 ‘워 보이’처럼 손깍지를 끼고 “김밥! 김밥!”을 외치며 열 일 제쳐두고 팝업 장소로 달려간다.


 누구 하나 지각하지 않고 팝업 장소인 W의 집으로 모였다. 현관에서부터 고소한 냄새가 진동을 하니 흥분해서 신발 벗는 스텝이 꼬여서 넘어질 뻔했다.


W는 살짝 질은 밥에(대부분 김밥의 밥은 고슬고슬한 편인데 이 집은 진 것이 포인트이다.) 단촛물로 간을 하고 어묵을 볶고 오이를 썰어 식초에 살짝 절인다. 맛살을 노릇노릇 굽고 햄을 안 먹는 나를 위해 햄버전과 햄 아닌 버전을 준비한다. 넓적하고 고소한 김에 간이 되어 있는 밥을 살살 펴서 그 위에 준비해 둔 어묵, 맛살, 단무지, 절인 오이 두 개를 얹고 돌돌돌 만다.


 주인장은 김밥을 마는 삼매경에 빠져있고, 게걸스러운 성인 여자 셋은 경건하기까지 한 모양새로 말없이 김밥을 입에 욱여넣고 있다. 2분이 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다음 줄이 나오고 또 다음 줄이 숭덩숭덩 썰어져 쟁반에 담겨 나온다. 햄스터처럼 양 볼을 늘리며 앉은자리에서 한 사람당 서너 줄을 먹는다.  


“사장님, 김밥 그만 마시고 이제 좀 드셔야죠.”

어느 정도 배가 차니 간신히 체면치레할 정신이 든다. “네, 이제 다 쌌습니다.” W도 합류하여 김밥을 먹기 시작한다. 고소한 참기름과 달달한 설탕물이 밥알과 김밥 속 재료에 스며들어 혀와 식도를 타고 부드럽게 내려간다. 기가 막힌 탄수화물의 향연이다.


 참여 인원 모두가 네다섯 줄 정도를 먹었을 무렵, ‘이제 더 이상 못 먹겠다’싶은 기류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남은 김밥을 누가 먹느냐 하는 눈치 게임을 하다 N이

“슬슬 후식 타임인가."라고 운을 뗀다. 나는 그 말에 자동 로봇처럼 벌떡 일어난다. 갈색 봉투에서 커피 알갱이를 그라인더에 와르륵 붓고 핸들을 손으로 돌려 커피콩을 간다. 칼로리를 조금이라도 소모해야 후식을 더 먹을 수 있다는 계산으로 방앗간에서 맷돌을 돌리는 돌쇠에 빙의한다. “마님, 커피콩을 다 갈았습죠.”

H는 커피 가루를 전해 받아 전자저울까지 받쳐놓고 심사숙고하며 커피 물양을 맞춘다. 거름종이를 통과하여 검은 액체가 똑똑 떨어진다.



 이 파도 김밥의 유래에 대해 말해보자면 8년 전쯤 한참 우리가 양양-제주 병(서핑을 이유로 양양이나 제주에 살고자 했던 병)에 걸렸을 때로 거슬러 간다. ‘가서 뭘 먹고살까’에 대한 해답으로 누군가 양양 죽도 해변에 분식집을 열자는 의견을 냈다. 이유는 W의 김밥이 맛있다는 것뿐, 우리 중 누구도 장사해 본 경험은 없었다. 신이 나서 가상으로 역할을 분배해 보았다. W는 김밥을 마는 역할, 깔끔한 H는 청소랑 설거지, 낯선 이와 금세 친구가 되는 N은 서빙, 나는 아침에 문 열고 돈 수금하러 오는 역할, 즉 ‘셔터맨’을 맡았다. 어딘가 기울어진 운동장 같긴 하지만 나는 별로 불만이 없다. 셔터맨이 기분파인 관계로 아마 가게 월세도 못 낼 것이라는 결론과 언감생심 다니던 회사나 열심히 다니자는 이유로 바다행은 무기한 미뤄졌다.


 이제 단 과자와 짠 과자를 꺼내 혈중 단짠 농도를 맞추기 시작한다. 자연스럽게 탄산음료를 컵에 따라 요새 이 그룹의 뜨거운 주제인 수영으로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눈다. 물 위에 누워서 하는 배영을 할 때 어떻게 하면 코에 물이 덜 들어갈까부터 접영을 할 때 가슴근육 쓰는 팁, 또 예쁜 수영복이 많은 중고 거래 사이트에 올라오는 웃긴 수영장 에피소드를 공유한다.


 대화가 이제 제주로 가서 산다면 뭘 먹고살까 하는 주제로 간다. 요새 서핑은 안 하지만 아직 양양-제주 병이 완쾌된 것은 아니다. 김밥 장인 W는 왜인지 생활력이 좋아 나물 뜯기나 해산물 채취도 잘할 것이라는 믿음을 준다. 요새 다니는 수영장에서도 1등으로 레일에 선다고 하니 다 같이 돈을 모아서 해녀학교에 보내자는 의견이 나왔다. 해녀학교를 졸업시킨 뒤 마을 발전 기금을 쾌척하여 로컬의 신뢰를 얻은 후 관광객들을 상대로 파도 김밥과 해녀 라면을 팔자는 거다. 다시 역할을 가상으로 분배해 본다. 역할은 양양과 다르지 않다. 낄낄거리다 보니 어느덧 배가 홀쭉해졌다.


 우리는 이따금 자기 집으로 불러 서로를 먹여주고 키워준다. 같이 먹은 음식들과 함께 쌓은 이야기들이 든든하게 내 몸과 마음의 뼈대가 되어준다. W의 파도 김밥과 N의 꿀 케이크와 함께 덤덤하게 나이 들어간다. 요즘 내가 시간도 많겠다 냉동실 안을 살펴보다 문득 영감이 떠올랐기에 이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긴급] 이번 주 목요일 들깨 파스타 팝업



이전 01화 타인의 음식취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