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미국, 그랜드 캐니언으로

미국 - 그랜드 캐니언(1)

by 지민규


언제부터 풍경을 좋아했을까? 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첫 해외여행보다 조금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2년 겨울, 그 겨울은 군대에서 복무하고 있을 시기였다. 당시 해안에서 야간 감시 임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밤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야간 장비를 끄기 위해 산을 왕복하고는 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장비를 끄기 위해 산을 올라갔다. 보통 그즈음은 해가 뜨지 않아 길이 굉장히 어두웠다. 하지만 그날의 보름달은 유독 밝게 빛나며 길잡이처럼 어둠 사이에서 길을 비추고 있었다. 그 길을 따라 산 중턱에 도착했을 때, 바다가 보였다. 어둠이 깔려 검게 물든 새벽, 유일하게 빛을 내는 보름달이 바다에 비춰 밝게 반짝이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당시의 일들은 자세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보름달의 모습만은 선명하다. 아직도 눈을 감고 그때의 풍경을 그려보곤 한다.


해안가를 따라 곡선 모양의 긴 산책로가 놓여있다. 아무도 오지 않는 새벽, 산책로의 가로등은 모두 꺼져있다. 그 위로 작은 바위들과 모래사장, 더 위로 어둑한 바다가 보인다. 그 바다에서 보름달이 만들어낸 긴 바닷길만이 유일하게 반짝인다. 파도의 흐름에 따라 때로는 어두워졌다가 때로는 밝아졌다를 반복하면서... 마지막으로 반짝임을 따라 위로 올라가면 구름 사이로 선명하게 동그란 달의 모습이 보인다.


이때부터 풍경이 좋아졌고, 여행을 다니며 점점 그것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이런 "풍경과 함께하는 여행"이 가장 어울리는 장소가 미국의 그랜드 캐니언이었다. 어디에 멈춰서도, 어디를 바라봐도 언제나 그 거대한 풍경이 보이는 곳, 시간이 지나도 풍경이 잊혀지지 않는 곳, 바로 그랜드 캐니언이었다.


그랜드 캐니언 파노라마




조프리 레이크를 끝으로 우리는 캐나다를 떠났다. 캐나다에서 많은 추억을 남겼지만, 새로운 여행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었다.


그렇게 떠난 미국 여행에서 우리는 캐나다와 조금 다른 추억을 남겼다. 캐나다는 자연과 캠핑, 한적함이 함께했다면, 반대로 미국은 도시와 말끔한 숙소들 그리고 북적거림이 함께했다. 서부 해안선을 따라 내려가며 포틀랜드,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등 유명한 도시 위주로 방문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여행의 분위기도 캐나다와 많이 달랐다. 금문교 같은 멋진 건물을 보거나, 할리우드에 놀러 가기도 하고, 미국 특유의 커다랗고 기름진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먹기도 했다. 완벽하게 도시스러운 여행이었다. 그렇게 미서부의 추억을 쌓아갈 무렵, 우리는 갈림길에 놓였다.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 그 어딘가였다. 로스앤젤레스 다음 여행지를 알아보던 우리는, 그랜드 캐니언이 로스앤젤레스에서 꽤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됐다. 라스베이거스를 포함해 3~4일이면 다녀올 만한 거리. 충분히 갈만한 거리였다. 기존처럼 해안을 따라 샌디에이고에 갈 것인가 아니면 시간을 조금 투자해서 그랜드 캐니언을 갈 것인가.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결정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로키산맥만큼 거대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다고?


그럼 가야지.


우리의 다음 여행지는 그랜드 캐니언으로 결정됐고, 그렇게 우리는 라스베이거스행 버스표와 그랜드 캐니언용 렌터카를 예약했다.


미국 여행 중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




그렇게 라스베이거스에서 차를 렌트한 우리는 그랜드 캐니언으로 향했다. 도시를 빠져나온 미국의 풍경은 로키산맥에서 느꼈던 모습과 같았다. 거대한 자연 안에 들어온 기분, 마주치는 차가 거의 없을 정도로 한적한 도로, 그리고 여행. 느낌은 비슷했지만 풍경은 정반대였다.


대부분이 산이었던 로키산맥과 다르게 그랜드 캐니언으로 향하는 길은 끝없는 평원이었다. 저 멀리 보이는 산들을 제외하고 우리의 주변은 온통 모래로 이루어진 갈색 평원이었다. 황량했다. 눈앞의 시야를 반으로 나누어 아래는 평원, 위는 구름 낀 하늘이 전부였다. 서부 영화에 나오는 벌판에 도로만 깔아놓은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그런 풍경이 낯설고도 아름다웠다. 흔히 볼 수 없는 황량한 평원은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얼마나 지났을까. 끝없이 이어지는 풍경에 이야기 소재는 떨어져 갔고, 어느새 우리는 조용히 도로를 달렸다. 3~4시간 동안 같은 도로를 달렸으니 그럴만했다.


여정 초반, 물론 예쁘기는 진짜 예뻤다.


그때... 풍경에 점점 무던해지고 지루해지던 그 시간에, 똑같기만 했던 도로에 조용히 무지개가 떠올랐다.


여행을 하다 보면 그런 순간이 있다. 계획하지 않았던, 예상치 못한 광경이나 상황이 우리들 앞에 나타나는 순간.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순간. 그리고 그런 순간으로 인해 여행이 좀 더 행복해지는 순간.


지금의 무지개가 그랬다. 사막 같은 이 황량한 평원에서 무지개라니... 생각도 못했던 그 조합은 예뻤다. 무지개는 광활하지만 단조롭기만 했던 풍경에 다채로움이라는 새로운 색깔을 얹었다.


우리는 차를 세웠다. 아직 갈 길도 멀고, 시간도 많이 늦었다. 여기서 시간을 보낸다면 숙소는 늦은 밤에 도착할 것이 뻔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차를 세워 예상치 못했던 그 순간을 감상했다.


하나는 조금 덜 선명할지도... 둘 다 선명해 보였던 건 추억 보정인 듯하다.


이후 우리는 잠깐 동안 무지개와 함께 도로를 달렸다. 그 덕분이었을까? 늦은 밤, 우리는 무사히 캠핑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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