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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by 뜰에바다

기독교의 구원은 쉽다. 돈이 들지 않는다. 학식이 필요하지도 않다. 남녀노소 누구든지 주 예수를 믿으면 된다. 현대의 고상하고 학식 높은 이들에게는 싱겁기조차 하다. 너무 쉬워서 우매하게 보일 정도다. '예수 믿으면 구원'이라니. 신이 예언의 때가 되어 이 세상에 예수로 왔고, 사람의 모든 허물과 죄악을 십자가에서 대속한 것, 그것을 믿으면 면죄되어 구원받다니. 생사와 영원이 달린 문제가 장난처럼 들릴 지경이다.

조금 더 복잡다단한 절차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오히려 두꺼운 경전을 암송하는 것이었다면 더 많은 이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믿지 않았을까? 어이하여 신은 구원의 도를 그토록 쉽게 섭리하였을까?


그런데 예수가 2천 년 전, 십자가 구원의 예표임을 자증한 기원전 놋뱀 사건은 더욱 단순하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 3:14~15)

기원전 1,408년 경, 에돔 왕이 광야에서 가나안 땅을 향해 행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땅 통과하는 것을 거절했다. 할 수 없이 38년간 방황하며 힘겹게 올라온 길을 다시 내려가서 우회해야 했다. 그 길은 멀고 험했다. 백성들이 인내심을 잃었다. 과 지도자 모세에게 불평과 원망을 쏟아냈다. 신이 그 지역에 있는 불뱀들을 보내, 반역하는 백성들을 물어 죽게 했다. 백성들이 잘못을 인정하고 모세를 통해 기도했다. 이, '놋으로 불뱀의 모양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면, 그것을 보는 자가 산다',라고 살길을 제시했다. 실제로 모세가 급조하여 장대 위에 내건 놋뱀을 바라본 자들이 다 살았다. 대신 그 사실을 믿지 않고 바라보지 않은 자들은 죽었다. 모세가 전한 신의 말은 장난이 아니었다. 실제였다.


현재도, 과거에 죽어가다가 놋뱀을 바라보면 살았듯이,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면 산다. 장난이 아니다. 실제다. 누구든지 산다. 가난한 이나 병든 자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진정한 의미의 생명이 된다. 문제는 사람이 예수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 앞에 오기까지 천 리 길, 만 리 길이다.

물론 사람이 예수에게 오는 길을 차단하는 거대한 장애물이 있다. 먼저는, 내 생각을 넘어야 한다. 둘째는, 과학과 철학과 심리학 등 학식과 문명을 넘어야 한다. 셋째는, 자기편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영물의 속임수를 알아차려야 한다.

네이버 지식iN에서 '신을 믿지 않는 이유'의 질문과 답변을 찾아보았다. (작성일 2022.03.28) 5개의 답변이 달려 있었다.

1. 선하게 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한 사람이 진정 이 세상의 불의와 불법을 보면서 나만큼은 처염상정의 결의로 선하게 살기로 결단하였다면, 스스로 자기 마음의 인정하고 싶지 않은 악의 모습을 직면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그것 때문에 심한 고민에 쌓이게 되겠지요.
2. 인생의 주인이 나에서 하나님으로 바뀌는 게 싫으신 분들이 안 믿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3.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장 큰 이유가 되지요. 많은 사람들은 빅뱅에 의해 진화되어 인간이 되었다고 보기 때문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4. 하나님이라는 절대자가 자신을 간섭하는 것이 싫은 사람, 하나님이라는 절대자의 존재가 믿어지지 않는 사람, 두 종류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5. 하나님의 예정하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자녀와 사탄의 자녀가 있고, 하나님의 자녀는 소수이고 사탄의 자녀는 다수입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의해서 가능한 것인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분들에게는 이 은혜가 없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놀라운 것은, 짧은 댓글에 '신을 믿지 않는 이유'가 다 나와 있었다. 선하게만 살고 싶지 않고, 나의 주권을 신에게 이양하고 싶지 않으며, 신이 믿어지지 않으니, 선택받지 못한 모습 말이다. 결국 사람의 생각과 방법으로는 어떤 통로로도 신을 믿기 어렵다는 결론이다. 신이 강권해서 불러주기 전에는 말이다. 그렇다. 사람은 누구도 스스로 신을 찾아 믿을 수 없다. 그래서 예정이다. 전적인 은혜이다. 자기 마음대로 신을 만드는 사람에게 신이 어떻게 구원자가 될 수 있는가?

하지만 단언하건대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왜곡이요, 정반대다. 미아를 자초하는 일이요, 사람이 안식을 잃고 지구를 떠도는 고아가 될 뿐이다.


19세기에 들어와서,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독일, 1804~1872)를 시작으로 철학·심리·사회학자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신을 부정하는 인본주의 사상'을 주창했다. 그것은 당시 지식인들에게 역사적인 사실과 최고의 불문율을 깨는 즐거움이요, 놀이가 아니었을까?

포이어바흐가 신호탄을 던졌다.
"신이 사람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신을 자기 형상대로 창조했다."

카를 마르크스(독일, 1818~1883)가 뒤를 이었다.
"종교는 사람들의 아편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독일, 1844~1900)가 망치를 들었다.
"신은 죽었다."

하여 21세기에는 예수 편과 반대편 정도의 양분이 아니라, 사람이 완전히 신을 매장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제야 아하, 깨닫는다. 신이 그토록 어린아이라도 알 수 있고, 고백할 수 있도록 구원의 도를 쉽게 만든 이유를.

금주에도 요양병원을 2회 방문했다. 그동안 꽤 건강하던 어른이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몸에 각종 의료 기구를 달았다. 한 주간 새에 얼굴이 달라졌다. 부종도 심했다.

"갑자기 몸이 안 좋아지셨군요!"

어른이 아예 말하지 못했다. 괴로운 몸짓을 할 뿐이었다. 마음이 급했다.

"어르신, 사람이 아프다가 가는 곳이 어디지요?"

어른이 게슴츠레 바라보다가 눈동자에 힘을 넣어 간신히 모기만 한 소리를 냈다.

"하늘나라."

감격의 눈물이 솟았다. 급히 다시 물었다.

"우리가 하늘나라 갈 때, 뭐가 필요하지요?"

어른이 가쁜 호흡 중에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에서 점차 힘이 빠져나갔다. 기다릴 새가 없었다.

"십자가에서 나 때문에 죽으신 예수님이지요?"

어른이 미간을 움직여 그렇다,라고 수긍했다.

"그럼, 됐어요! 힘들어도 안심하시고, 마음으로 지금 예수님께 몸과 영혼을 부탁하세요. 예수님의 손을 꼭 잡으세요."

"네."

다행히 마지막엔 어른이 입안 소리를 냈다. 나는 그것을 구원의 완성으로 받았다.


가슴이 따뜻했다. 구원의 길로 가는 데, 육체가 꺼진 들 무엇이 더 필요한가! 더한 지식도, 아쉬움도 필요 없었다. 영원한 생명을 얻었으니, 족했다. 하여 나는 확연하게 알았다. 신이 그토록 구원의 도를 단순화한 이유, 그것은 바로 마지막 길에 설 모든 사람 때문이라는 것을. 다 잊어도 예수, 그 이름만 잊지 않으면 되니까. 아하, 그것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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