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집 근처 근린공원에서 한 번씩 만나는 이가 있다. 처음엔 왜 길 아닌 데로 갈까, 싶었다. 어느 날 정면으로 마주쳐서 인사했다. '고양이 밥 주러 나오거나 들어갈 때' 나를 만난다고 했다. 숲 속을 자세히 보니, 허름한 길고양이 집이 하나 있다.
때로 운동을 위해 공원에 조금 더 지체하면, 사람들이 반려동물을 데리고 나온다. 무더위 속이건, 혹한의 영하이건 똑같다. 자기 운동이 아니라 반려동물을 위한 행보라는 것을 눈치로 알 수 있다. 사람이 반려동물을 대하는 태도가 자식을 양육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현재 국내에서 반려동물 양육자들이 상승하고 있다. 2025년 2월 농림축산식품부에서 공개 발표한 '제3차 동물복지 5개년(2025~2029년) 종합계획' 배경 자료를 보면, 반려동물 양육 가구가 무려 28.6%다. 거주지 아닌 곳에서 다른 가족이 키우는 것은 제외했음에도 말이다.
24년 기준 1인 가구가 34%이니, 나올 만한 수치다. 결혼하지 않고 반려동물을 평생의 반려자로 선택하기도 한다. 결혼했어도 자식 낳지 않고 반려동물을 키운다. 혼밥·혼술 시대에 반려동물이 새로운 가족 형태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은다. '갈등과 원망이 없고, 떠나도 함께한 시간만 남아서'라고.
반려동물의 지능은 일반적으로 2~2.5세 어린아이 수준이라고 한다. 평균적으로 약 165개의 단어를 이해할 수 있다. 숫자 1, 2, 3 정도의 수량 차이를 구분한다. 반복된 훈련과 경험으로 ‘하면 안 되는 행동’을 이해한다. 단순한 퍼즐 장난감이나 문 여는 법, 숨겨진 간식 찾기 같은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 무엇보다 주인이 슬퍼하거나 기뻐하면 비슷한 정서 반응을 보일 수 있다.
따라서 사람이 그것에 만족하여 반려로 삼고, 온갖 애정을 쏟는다. 반려동물과 살면서 적극적으로 빈 둥지 증후군을 해결하기도 한다. 과거 가난했지만, 모두가 모여서 왁자지껄하게 살던 대가족의 삶이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반려동물 양육자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인류 전체를 바라볼 때, 이것이 바람직한 현상인가, 해서다.
신은 사람을 반려자로 삼았다. 하여 동물 중 사람을 가장 특별하고 존귀하게 만들어, 최고의 애정을 쏟는다.
"너를 지으신 분께서 너의 남편이 되실 것이다. 그분의 이름은 만군의 주님이시다. 너를 구속하신 분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온 세상의 하나님으로 불릴 것이다." (사 54:5)
비록 첫 사람 아담이 배반하여 어긋났지만, 이후에도 그 사랑을 거두지 않았다. 모델 이스라엘을 세워 끊임없이 구원 계획을 말하고, 확증했다. 바야흐로 그 사랑의 극치가 '신이 사람 된 것'(성육신)이다. 그 사랑의 결정체가 예수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사람 된 신이 있는가? 사람에게 생명 주기 위해 자기를 죽음의 제물로 내놓은 신을 보았는가?
물론 신이 사람이나 동물이 되어 사람을 돕는 사례가 힌두교의 아바타(강림) 개념에도 있다. 하지만 힌두 신 비슈누(Vishnu)는 사람을 구제하는 차원이다. 근원적인 문제 해결이 아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도 신이 사람으로 세상에 나타나나, 구원이 아니라 사랑·복수·시험 등 개인적인 목적이 대부분이다.
'서기(西紀)'를 사용하는가? 서기는 기원 원년 이후, 주로 예수가 태어난 해를 원년으로 한다. 예수 이전이 기원전 BC(Before Christ)이다. 지금은 예수와 함께 사는 AD(Anno Domini) 2025년이다. 6세기에 만들어졌지만, 현재 세계 거의 모든 나라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한다. 예수가 인류와 함께한다는 의미다. 예수가 인류 역사의 중심이라는 증거다.
물론 한국은 유교와 불교가 익숙하다. 고려와 조선시대의 토양에 오래 머물러서다. 아직도 여러분에게 예수가 생소하다면, 그것은 단지 예수가 서양 옷을 입어서가 아닌가?
지난 7월, 나의 지인이 16년간 함께 한 반려동물을 잃고 몇 날 며칠을 울며 휘청거렸다. 정서의 문제이므로 최대한 지지하여 그녀의 회복을 도왔다. 반려동물, 확실히 애정의 대상이다. 사람의 정서 안정과 안녕에 크게 기여한다.
하지만 엄밀히 지성적으로 따져보라. 반려동물은 본질이 아니다. 대체물이다. 때로 자녀를 대체한다. 혹은 애인을 대체한다. 사람은 소통이 필요하며,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임을 드러낼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인정해야 한다.
인류와 나의 구원자, 반려자 되는 예수를 그만큼만 사랑한다면? 그것의 반이라도 응답하며 산다면?
여러분이여, 사람을 위해 사람이 되어, 죽음으로 나와 인류를 구원한 예수를 가슴에 품어보라. 하여 얼마나 틈새가 없는 충만함인지 경험해 보라. 어찌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에 준하랴! 어찌 반려동물에게 내 마음을 주는 것에 비하랴!
그것과 이것은 다르다고? 물론 다르다. 하지만 또 절대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