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 및 인지 저하로 지난 6월부터 섬기는 재단의 한쪽 침상을 차지하고 살아가는 어른이 있다. 어른은 평소에는 점잖지만, 한 번씩 울음을 터뜨린다. 하지만 그 울음이 독특하다. 소리를 삼키고 우는 울음이 아니다. 세 살 아이가 천지가 떠나가도록 떼를 쓰며 우는 울음이다. 팔십 세 어른이 세 살 아이 울음을 목 터지게 한두 번씩 반복하는 것, 어떤 사연이 있어 그것이 장애 증상이 되었을까? 그럼에도 나는 한 번씩은 부럽다. 어른이 어린 날 그렇게 울었을 때 누군가 달려와서 욕구를 즉시 해소해 주었으므로 우는 것으로 해석되니까.
나는 그런 울음을 울어본 기억이 없다. 달려와서 지지해 주고 해결해 줄 사람이 없는데, 뭐 하려고 그렇게 투정 부리며 울겠는가? 일곱 살에 아버지가 내 곁을 떠났다. 어머니는 생계를 꾸리느라 여분의 손길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나의 십 대는 먹장구름이다. 내 것을 쟁취하기 위해 떼를 쓰거나 억지로 무언가를 가져본 적이 없다. 내 욕구나 필요보다는 부모 중 한쪽만 남은 엄마의 마음을 읽는 일이 우선이지 않았을까? 하여 엄마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요, 엄마의 회색빛이 나의 빛깔이었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동일시'라고 부를 것이다.
내가 나의 십 대 먹구름의 원인을 알게 된 것은 반세기를 살고 나서다. 침묵기도 안에서 그 근원이 돌연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 내가 비로소 일곱 살 아이로 돌아가서 생애 처음으로 서너 시간을 목 놓아 울었다. 그것을 나의 졸저, 《예수와 함께 복음서 읽기》(부크크, 2022)에 기록했다. 한 부분 가져오면 다음과 같다.
침묵 속에 한참을 머물렀다. 30분은 족히 흘렀다. 그런데 갑자기 아빠라는 단어가 나의 입안에서 모래알처럼 맴돌았다.
"아."
"빠."
내가 읊조렸다.
"아. 빠."
끊어졌던 단어가 연결되고 소리가 되었다. 놀라운 것은 그다음 말이었다.
"아빠, 가지 마세요!"
그것은 말이 아니었다. 절규였다.
"아빠, 가지 마! 아빠, 가지 마!"
묵상하는 나의 손이 무릎과 바닥을 반복하여 내리쳤다.
"아빠 가지 마! 아빠 가지 마! 아빠가 가면 엄마와 우리 어떻게 살아! 아빠가 가면 엄마와 우리 어떻게 살아요! 흑흑!"
어디에 묻혀 있다가 그런 말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것일까. 나에게 일곱 살 당시의 생각이나 영상은 남아 있는 게 없었다. 다만 묵상 안에서 보니 일곱 살 나의 마음은 아빠가 가족을 두고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 아빠가 엄마를 비롯하여 어린 네 남매를 남겨두고 죽지 않는 것이었다. 그 밤, 일곱 살 당시 나의 소망이 라이프 스토리를 묵상할 때 의식 위로 튀어 올라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따라서 밤이 늦도록 나의 울음이 어떤 곡성처럼 묵상실에 메아리쳤다.
"아빠 가지 마! 아빠 가지 마! 아빠 제발 죽지 마!"
말할 것도 없이 무의식에 묻어두었던 울음을 두어 차례 쏟아낸 후 나는 자유로웠다. 자신을 아는 인생이 되었다. 그럼에도 어떤 상황에서는 어처구니없이 평생에 걸쳐 '부럽다'는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대부분은 '가져보지 못했거나 해 보지 않은 몸짓에 대한 아쉬운 감정들'이다. 그렇다면 양부모 없이 자란 이들에게는 얼마나 더 그런 그림자가 많을까? 얼마나 더 그 허기가 크고 선명할까?
차제에 이성남 장학사(영천교육지원청)의 《나는 행복한 고아입니다》 (북랩, 2020)를 찾아 읽었다. 그는 대놓고 자신을 '보육원에서 자란 고아'라고 소개한다. 그것이 그에게 더 이상 트라우마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말 중 처연한 것은 소풍 가는 날과 명절이 가장 외로웠다는 말이었다. 소풍은 도시락이 없어서였다. 명절은 선물은 있을지언정 부모가 없으니, 종일 TV만 보는 날이었다. 졸업식 날도 외로웠다. 부모가 있어서 안 오는 것과 아예 부모가 없어서 혼자인 것은 달랐다. 그중 가장 가슴 아픈 대목은 다음의 내용이었다.
"나는 투정도, 애교도 부릴 줄 모른다."
"부모 중 누구를 더 닮았는지 알지 못한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태어나자마자 얼마 안 돼 걷고 달리는 동물과 달리, 사람은 '아이'라는 요람에서 부모의 손길로 자라게 되어 있다. 각자 타고난 재능은 다르나 영·유아, 아동기에는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수 요소인 것이다. 하여 아이 시절은 누구에게든지 인생의 기초가 되는 기본적인 신뢰와 사랑, 언어 소통, 정서 공감, 자기 존중감 등등을 배우는 텃밭이다. 무엇보다 부모의 사랑과 돌봄 속에서 조물주의 큰 사랑을 배우는 때이기도 하다.
그 후 십 대와 이십 대의 질풍노도 시간을 거쳐 독자적인 삶에 들어서면서, 삼십 대 이후에는 역할이 백팔십도 바뀐다. 이후에는? 부모가 먼저 조물주의 품으로 돌아갔듯이, 나도 영혼과 정신의 부모인 조물주의 손을 잡고 하늘나라로 돌아간다. 인생이 복잡한 것 같아도 얼마나 단순한지! 조물주에게서 왔다가 다시 조물주에게 돌아가는 것, 그것이 여러분과 나의 인생이다.
하여 조물주는 실제 부모가 되어 인생들을 부른다. 그리고 인생 요람의 주인공이 되는 부모에게 조물주의 마음과 손길을 고스란히 담았다. 그것이 누구를 막론하고 아이에겐 부모 손길이 필요하고, 그 손길이 절대적이며 우주가 되는 이유이다.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요한복음 1:12)
"어머니가 어찌 제 젖먹이를 잊겠으며, 제 태에서 낳은 아들을 어찌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비록 어머니가 자식을 잊는다고 하여도, 나는 절대로 너를 잊지 않겠다." (이사야 49:15)
"나는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요한복음 14:18)
그래서일까? 나는 60대를 사는 지금도 저녁 어스름을 좋아한다.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안식하는 시간이기도 하거니와 엄마가 밖에서 돌아오는 시간이니까. 엄마는 어둠이 내려앉아 울타리가 될 때쯤 어김없이 사립문을 밀고 들어섰다. 그때의 반가움과 충만함은 지금도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엄마가 우주였던 아이에겐 당연했다. 여름날, 저녁을 먹은 후 마당에 멍석을 펴놓고 엄마 옆에 누워서 엄마의 팔을 베개 삼아 별을 세던 밤은 인생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 아니었을까.
하여 나는 여기 세상에서 나의 백 년 인생이 다하면, 저기 하늘 영토에서 또 내 조물주의 손을 팔베개하여 그렇게 안식할 것이다. 거기까지가 내 인생이니까. 생각만 해도 기쁨이 몽실몽실 피어오른다.
이성남 장학사도 아이 때 부모의 사랑이 절대적인 것과 그것이 조물주의 사랑과 똑같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힘이 생겼을 때 '한국 고아 사랑 협회'를 창설하여, 교육자로서 아이들이 기본적인 사랑 위에서 자라게 하려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특히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보육사들에게 머리 숙여 부탁하기도 한다. (같은 책)
2억 5천만 원을 투자하여 키워 낸 고아의 25%가 평생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살아가는 것은 정부의 보육 정책이 미흡하다는 증거다.
첫째, 아이의 욕구 발달 단계를 기억하자. 둘째, 부모처럼 대하자. 셋째, 나를 항상 성찰하자. 넷째, 아이들의 상처를 보듬어 주도록 힘쓰자. 마지막으로 아이가 삶의 행복을 느끼도록 도와주자.